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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테너 김동현이 멋있는 이유
팔 사용 불편에도 근성으로 독일 국립오페라단 입성
한국으로 돌아와 장애인 인식개선 등 위해 재능 기부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9-01-30 14:45:241
테너 김동현 ⓒ김동현
▲테너 김동현 ⓒ김동현
못할 것이라고 하면 꼭 해내는 근성

1962년 10월 태어나 10개월이 지난 1963년 여름, 겨우 기어다니기 시작한 갓난아기였던 김동현은 벽에 세워 놓았던 미닫이 문 사이로 기어들어가다가 문짝이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어깨를 크게 다쳤다. 그날의 사고로 오른팔을 올릴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디가 장애냐고 물을 정도로 겉으로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오른쪽 팔 상지가 작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오른쪽 손을 사용하려면 오른쪽 팔꿈치를 어디엔가에 올려놓아야 한다. 지지대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나 성악가로서 팔의 장애는 큰 문제가 된다.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양팔을 벌린다거나 하는 제스처가 필요한데 김동현은 그런 표현이 어렵다.

천성이 순하고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그는 묘한 근성 같은 것이 있었다. 위험하니 자전거나 스케이트 같은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 하고 싶어졌고 자전거도 스케이트도 결국 마스터해 버리고는 했다.

좋아하는 것은 꼭 배우고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성격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에 상당한 토대가 되는 부분이다. 모태 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찬양대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졌다.

운동과 달리 음악은 신체 능력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서 좋았고, 정서 순화에 도움이 된다며 어머니께서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고교 시절 합창반을 지도해 주신 김명엽 선생님을 만나면서 음악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그는 대학 입시를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바로 음대 성악과에 진학하려면 노래 외에 피아노 연주도 기본으로 할 줄 알아야 했는데 피아노는 두 팔을 다 사용해야 하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서서 피아노를 쳤다. 선 자세에서 오른쪽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에 닿으면 연주는 가능하였지만 페달을 밟을 수 없었다.

등받이 의자로 오른팔 팔꿈치를 올려놓고 연습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꼰 자세로 오른쪽 팔꿈치를 다리에 괴고 피아노를 치는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그렇게 하니 가장 안정적으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고3 시절 피아노를 기초부터 배우고 하루 8~9시간씩 손가락과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연습하며 입시를 준비한 결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1981년 3월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음악가로서의 삶에 발판을 마련했다는 기쁨에 학교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벚꽃이 아름답게 흩날리던 그해 4월, 그는 기관지염으로 무척 아팠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기침이 나고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병원을 찾았다. 그때 그를 진찰했던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동현 씨! 지금 기관지염 자체는 심각한 상태가 아니지만, 동현 씨는 팔이 불편한 문제 때문에 성악을 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인 것 같아요. 건강에도 좋지 않구요. 성악을 하지 말고 다른 학문을 전공하는 게 어때요? 진지하게 고려해 보세요.”

의사는 진심 어린 충고를 하였지만 그는 음악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기에 다시는 그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음악을 사랑했고, 불리한 조건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진로를 고민하며

음악가로서의 삶에 초석을 다졌다는 기쁨에 학교생활은 무척 즐거웠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신학대학원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였다. 교회 찬양대 활동을 하였는데 수련회에 갔다가 운명의 여자를 만났다.

“어떡하지? 피아노 반주자가 갑자기 못 온다고 했다는데, 큰일이네 정말!” “그럼 제가 반주를 할까요?” 김동현은 찬양대로 참가를 했지만 반주가 없으면 찬양대가 노래를 부르기 힘든 상황이라서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없었다. 피아노는 대학입시를 위해 배웠을 뿐이다.

그래도 급하니 연주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피아노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였다. 사람들 눈에는 그가 다리를 꼬았는지 폈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단 한 사람 그녀 눈에는 그 모습이 몹시 거슬렸다.

그 거슬림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두 사람은 첫 만남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대학원생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교회음악에서는 지휘가 필수라는 것을 알고 전공을 포기하고 독일 유학을 결심하였다.

독일은 모든 대학이 국립이고 외국인에게도 학비를 받지 않아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학을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국가어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당시 을지로 입구 학원 새벽반에서 문법, 독해 등을 공부하고, 낮에는 남산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독일문화원으로 가서 독일어 강좌를 들었고, 노래 연습도 밤낮 없이 계속했다.

이때는 비행기만 보면 울먹이며 기도했다. ‘저 노래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런데 유학은 그녀와의 이별을 뜻하기 때문에 그것 또한 김동현을 짓눌렀다. 그는 그녀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독주회에서 ⓒ김동현
▲독주회에서 ⓒ김동현
두 가지 목표를 이루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쾰른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을 목표로 준비를 했다. 경쟁률은 무려 40대 1이었다. 그는 외국인이자 동양인 게다가 음악하기에 불리한 장애를 가지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음악 수재들과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했다.

방법은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피나는 노력을 거듭한 결과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7개월 만인 1988년 봄, 쾰른 국립음악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쾰른 음악대학에서 에다 모저(Edda Moser) 교수를 만났다.

모저 교수는 그가 음악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엄청난 것들을 모두 전수해 주신 분이다. 유학 생활은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어느 날 그의 생일에 친구들이 자전거를 선물했다.

친구들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 그는 그걸 어디에서 구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들은 자전거를 산 것은 아니고 라인 강변에 팽개쳐져 있던 고물 자전거를 ‘주워 왔다’고 했다. 절도를 할 수는 없었기에 며칠 밤낮 교대로 망을 보면서 주인 없는 자전거임을 확인한 후 자전거 수리점에 들러서 수리를 한 후 가져왔다고 말했다.

당시 돈으로 10마르크(5천 원 상당)를 들여서 고쳐 왔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당시로서는 정말 눈물겨운 우정의 선물이었다. 동현이 다리가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한쪽 팔의 장애로 보행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친구들이 자전거를 선물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듬해인 1989년 그는 한국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1992년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는 오페라 단원이 되고자 오디션을 준비했다. 독일 오페라단의 오디션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이유는 경쟁률에 상관없이 오페라단에서 필요로 하는 특정한 목소리를 찾기 때문이다.

그에 맞춰 최선을 다하였지만 함부르크와 슈트트가르트에서 각각 한 번씩 낙방을 하였다. “김동현 씨, 합격입니다!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네, 네… 네?” 그는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노래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원하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 그냥 멍할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평생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뜻하는 인생 최대의 기쁨이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 인생 목표가 있었다. 하나는 노래하며 사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직장을 갖는 것이었는데 장애가 있는 그로서는 두 가지 다 이루기 어려운 소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1992년 10월 9일 그가 꼭 서른 살이 되던 날, 이역만리 독일 땅, 그것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국립 베를린도이체오페라단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의 목소리가 오페라단이 필요로 하는 하나의 목소리로 선택된 것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을 가진 듯 그는 정말 기뻤다.

합격과 낙방도 장애와 무관한 결정이었다는 것이 독일 사회의 수준이었다. 그가 활동할 당시 베를린도이체오페라단에는 그를 포함하여 20여 나라에서 온 1천여 명의 직원이 있었다.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일을 했지만 외국인이나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이나 불편함을 겪은 일은 없었다.

어느 날 오페라단 매니저가 그에게 말했다. “팔이 불편한 줄 몰랐습니다. 당신 1년 휴가는 8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악기 운반 등 무거운 것을 들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당신 권리입니다.”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고 1년 휴가일을 7주에서 8주로 늘려주었고, 각종 세금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팔에 무리가 올 만한 일들은 거절할 수 있는 권리에 부당한 해고에 대한 보호까지 받아 장애인을 배려하는 독일 사회 시스템을 한껏 누렸다.

고국에서 다시 시작하며 재능기부로

6년 동안 오페라단에서 활동한 후 1998년 귀국하였다. 독일 국립오페라단원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활동 자체만으로도 큰 명예이며 그만큼 경제적인 보상도 뒤따르는 여유로운 삶을 뒤로하고 그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두 아들을 한국인으로 키우고 싶었고, 무엇보다 고국에서 살며 그동안의 경험을 조국에서 발휘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또다시 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헤쳐 나가야 했다.

그가 성결대학교 음악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국에서의 생활에 안정을 찾을 무렵 대학 동기인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우광혁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다.

“야, 너 마침 잘 왔다. 재능기부 좀 해라.”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는 친구 따라 장애인 봉사활동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장애인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 만났던 백경학 이사가 운영하는 푸르메재단의 재활병원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음악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애인계에 들어왔다.

특히 성결대에 황영택이란 학생이 입학하면서 장애인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황영택은 산업재해로 하반신마비 장애를 갖게 된 후 장애인 테니스 선수로 국위를 선양하다가 성악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다고 대학에 입학한 만학도였다.

앉아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나름대로의 방식을 찾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감동하였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정립회관에 자주 갔었고 그때 휠체어를 사용하는 음악인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을 본 것이 전부였는데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후 주위를 둘러보니 장애예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재능을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김동현이 멋있는 이유이다.

보통 성공한 장애인들은 장애인 세계에 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심지어 장애를 공개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거의 대부분 경증이어서 비장애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김동현 교수는 스스로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장애인 공연 섭외가 들어오면 흔쾌히 허락한다. 2006년부터 3년 동안 이희아, 박마루 등과 함께 ‘희망으로 콘서트’에 참여하여 전국을 다니며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가곡 사랑

두 아들 가운데 작은아들이 성악을 전공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장애가 있든 없든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구조이다. 무대에 설 때마다 마지막 무대라는 각오로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성악가로서의 자세를 말한다.

그는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우리 가곡이 서양 창법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한국의 전통미가 부족한 경향이 있어서 국악적인 색채를 띄기 위하여 반주에 대금을 넣기도 한다.

새로운 가곡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묻혀 있는 가곡을 발굴하여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는 가곡 연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 학력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수학, 독일 국립쾰른음악대학 대학원 졸업

# 주요 경력

독일 베를린 도이체 오페라단 단원 역임 성결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 교수 우리가곡연구회, 한국독일가곡연구회, 서울예술가곡연구회, 성음회, 우리가곡연구회 회장 남서울교회(당회장: 이철 목사) 호산나 성가대 지휘자 뷰티플마인드 뮤직아카데미 교사 등

# 연주 경력

슈베르트 Die scho ne Mullerin 전곡 연주 La Boheme, Faust, Martha 등 주요 오페라 50여 편 출연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베를린 징 아카데미 초청 <메시아> 협연 루블리아나 방송교향악단 초청 <말러 8번 교향곡> 협연 슈베린 국립가극장 초청 <베토벤 9번 교향곡>, <헨델 체칠리언오데> 협연본 바하 합창단 초청 <미사 솔렘니스>, <엘리야>, <메사디 글로리아>, <천지창조> 협연본 바로크 페스티벌 출연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복음기자>, <바흐 칸타타>, <베토벤, 모차르트, 푸치니, 비발디, 드보아 미사곡>, <성가연주회> 독일가곡연구회, 서울예술가곡연구회, 우리가곡연구회, 성음회 등연구단체의 정기연주회, 기획연주회 출연 2010년 독주회(금호아트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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