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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갔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았다
고 추영무 소장 1주기를 기리며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05-02-22 23:59:301
고 추영무 1주기를 맞아 분향하는 사람들. <이복남 기자>
▲고 추영무 1주기를 맞아 분향하는 사람들. <이복남 기자>
작년 이맘 때. 2004년 2월 18일 부산배화학교 총동문회장 이자 한국농인문화센터 소장인 추영무가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

배화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몇몇 동문들과 자갈치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청각장애인복지를 논하던 중 그는 사라졌고 몇시간 뒤 자갈치 앞 바다에서 주검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지난 2월 17일 한국농인문화센터에서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회원, 봉사자 등 50여명이 모여서 추영무 1주기를 기렸다.

고 추영무는 배화학교를 졸업학교 1982년 늘사랑 조정호 원장을 만나면서 '참된 봉사자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임을 배우고 깊이 공감하면서 청각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전수일 감독과 유럽여행 오른쪽이 추영무. <이복남 기자>
▲전수일 감독과 유럽여행 오른쪽이 추영무. <이복남 기자>
1984년, 농아인의 잠재능력 개발과 정서함양을 위해 조정호 원장이 기획하고 가톨릭농아선교회가 주관한 농아연극 '스테파노의 죽음’에서 예수 역으로 연극무대에 데뷔하여 권택구(추영무 추모회 이사)씨와 함께 열연하여 연기자의 자질을 인정받아 이후 두 편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연극 ‘스테파노의 죽음’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아들만 출연했던 연극으로 농아 연극의 효시가 되었다.

1985년, 두번째 연극 ‘아합의 눈물’에 출연을 계기로 농아의 연기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전수일 감독(경성대 연극 영화과 교수)의 대학 졸업 작품‘소리빛깔’에 홍승호(현 한국농인문화센터 관리장)와 함께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였다. 소리빛깔은 농아의 일상을 그린 순수 단편 영화로 청소년 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영화출연 이후 영상예술 제작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전수일 감독과 형제 같은 특별한 교유를 갖게 되었다.

1986년, 연극으로서는 마지막 작품인 '네 영혼을 나에게’에 출연하여 뛰어난 연기로 관객들을 감동 시켰고,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이 연극은 작품성과 함께 농아 연극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모든 출연진은 그때의 감동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월 한 번씩 모임을 가지고 있다.

1988년, ‘늘사랑 가족’의 상주 봉사자가 되어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 자신의 예술적 자질을 발견하여 도움을 아끼지 않는 ‘늘사랑 가족’의 조정호 원장과 함께 장애인을 위한 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이후 그는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오로지 장애인의 아픔만을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던지는 희생적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1992년, 2월에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통신수단을 이용할 수 없었던 농아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6개월간의 연구 끝에 숫자만으로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삐삐 문자수첩을 개발하여 배부하여, 이 수첩은 삽시간에 농아의 필수품이 되었다.

2002 아태경기대회에서 마임 공연. <이복남 기자>
▲2002 아태경기대회에서 마임 공연. <이복남 기자>
1992년, 7월에는 프랑스 유학 중이던 전수일 감독의 초청으로 파리 단편 영화인 모임에 참석하여 영화에 대한 지식을 넓히고 전 감독과 같이 여행하며 프랑스의 장애인 시설을 방문할 기회를 갖는다. 그리고 독일에서 박상대(현 가톨릭대 교수)신부의 안내로 오스트리아의 장애인 복지 세미나에 참여하는 등 1개월간 유럽에 머물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는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당시까지 운전면허 취득이 거의 불가능했던 한국 농아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조정호 원장이 내무부장관 표창 받은 것을 계기로 내무부장관과 면담하는 자리에 동석하여 농아 운전면허 취득법 개정을 강력히 건의한 결과, 후일 법개정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농아의 면허취득이 용이하게 되었다.

1994년, 문자수첩 초판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2판을 발행,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TV, 신문 등 매스컴에 보도되어 농아가 겪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통신문자 수첩은 1998년까지 5판을 발행, 큰 성공을 거두었고 어느 통신사와 특허까지 구상하던 중 휴대폰의 빠른 보급으로 무산되었다.

1995년, 농아들의 삶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2년 동안 비디오 촬영법을 통한 영상공부를 하고 일본 홋카이도 지방으로 영상 촬영차 여행하며 현지 농아 마임 배우들과 만나 대사가 필요 없는 마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97년, 음향이 따르는 영상 작업에 농아의 한계를 느껴 방향을 선회하여 사진공부를 시작, 사진작가 정봉채 선생님의 지도 아래 화이트회원전, 7인전 등에 출품하였고, 그 후 농아인들로 구성 된 사진반을 만든다.
분향소에서 추영무의 추억을 나누는 사람들. <이복남 기자>
▲분향소에서 추영무의 추억을 나누는 사람들. <이복남 기자>
2000년, 그동안 유럽을 두차려 갔다왔고 동남아와 일본을 여러차례 다녀 오면서 구상한 '한국농인문화센터'를 설립한다. 문화센터는 농아들의 정보 교류를 비롯하여 문화 교육의 장이다.

그리고 2002년 배화학교 총동창회장에 선출되어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단합이 잘 되지 않는 동창회를 서로에게 힘이 되고 참된 우정을 쌓아 가는 동창회로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나 그 꿈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한 채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떠난 후 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농인문화센터'를 발전 시켜야 할 책임을 느끼며 그가 남긴 마지막 선물인 문화센터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누구나기자로 현재 하사가장애인상담넷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복남 기자(ablenews@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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