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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환의 장애인물전 - 김기창 화백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9-05-16 08:32:301


<장애인물 톺아보기>

우리 사회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장애 인물과 그의 열정적인 인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장애인물 톺아보기>. 이 코너 함께 해주실 분,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질문1 : 오늘 소개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답변 : 8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언어장애를 함께 갖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화가의 한사람이었던 운보 김기창 화백입니다.

우리나라 화가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선정할 때 성향에 따라 각각 다리긴 하지만요.
김홍도 화백, 신윤복,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그리고 김기창 화백 등을 꼽는데요.
그러니까 김기창 화백이 얼마나 대단한 분이신지 짐작이 가실 거고요.

지난 1993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가지고 계시는데요.
대표작으로는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등이 있는데요.

이외에도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열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1986년 5·16민족상과 서울시문화상, 그 다음해에 색동회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만원권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린 분이 김기창 화백입니다.

질문2 : 장애인복지를 위한 사업들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답변 : 물론입니다. 김기창 화백 스스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가 계셔서 지난 1979년 한국농아복지회를 창립해서 초대회장을 지내셨고요.

뿐만 아니라 1984년에는 서울 역삼동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센터인 청음회관을 개관해서 청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해서 청각장애 학생들의 모임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각종 정보들, 가령 상급학교 진학이라든지, 취업에 관한 정보들도 청음회관에서 얻어갔고요. 그리고 수화교실을 열어 수화보급에 나서기도 했는데요.

어쩌면 김기창 화백께서 설립하신 청음회관은 청각장애나 언어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복덕방과 같은 곳이기고 하고요. 또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허브역할을 하는 아주 주요한 기관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질문3 : 김기창 화백의 8살 때 청력을 잃었는데 어떻게 화단에 입문하게 되었는지, 또 그 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궁금한데요?
답변 : 김기창 화백은 1913년 서울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요. 여덟 살 초등학교 2학년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력을 잃게 됩니다.

들을 수 없으니 여덟살 때까지 사용했던 단어밖에 몰랐고 자연스럽게 언어장애를 동반하게 되어 초등학교를 열 일곱살에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목수일을 시키려 했지만 어머니가 그림에 재능을 알아보고 당대 최고의 화백이었던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로 들어가게 합니다.

김은호 화백은 구한말 최후의 어진화가 그러니까 임금님의 초상화를 그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화가였던 분이었습니다.

여기서 김기창 화백의 천재성이 발휘되는데요. 스승인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운지 6개월만에 ‘판상도무-널뛰기’(1931)란 작품으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하게 되는데요.

이 입선기록은 최연소 입선기록이었고요. 당시 언론에 ‘듣지 못하는 소년’이 화가가 되었다고 크게 기사화 되기도 했습니다.

김기창의 화백의 천재성은 첫 출품 입선이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하게 됩니다. 특히, 24살 때인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연4 회 특선 경력으로 김기창 화백은 27살에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됩니다.

질문4 : 그런데 김기창 화백이 친일화가란 지적을 받고 있지 않던가요?

답변 : 그렇습니다.
김기창 화백이 1913년생이고요. 일제 강점기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식민통치를 당한 시기이니까 김기창 화백이 태어나 그림을 배우면서 그림에 가장 열정적인 청년 시기와 일제 강점기가 겹치면서요.

그리고 스승이었던 김은호 화백의 수제자격이었던 김기창 화백도 화풍면에서도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 화식 채색화법을 김은호 화백으로부터 배웠고 친일행각도 스승의 길을 따랐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김기창 화백의 친일은 27살 약관의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친일 행적은 1943년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와 44년 4월에 조선식산은행의 사보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란 작품이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는데요.
특히나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란 작품을 보면 '축 입영’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그려진 삽화입니다만,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으로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한 표정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기에 친일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고 있습니다.

질문5 : 그럼, 해방이후 작품세계는 어떻습니까?

답변 : 해방 이후 김기창 화백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가령 1946년 5월에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12월에는 ‘미술운동과 대중화 문제’와 같은 글을 발표합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도에 이르러서는 동양화가 추상 예술의 풍조를 따라 시대성에 발맞춰 전진해야 한다며 ‘현대 동양화’ 운동을 주창합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김기창 화백은 박내현 화백과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이듬해인 1947년부터 제1회 ‘우향-운보 부부전’을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는 한국 미술계 최초의 부부전이었으며 1971년 제17회전까지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결혼전 부인 박내현 화백은 1941년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1943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총독상을 수상하는 뛰어난 재원이었습니다. 박내현 화백은 김기창 화백과 결혼한 이후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단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김기창 화백은 부인의 영향으로 서양 입체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실험적인 작품을 구상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완전한 추상화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특히, 부인이 60년대 후반 미국에 유학하자 적색과 황색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작품 세계를 선보이게 됩니다. 가령, 장식적 산수화를 새롭게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와 해학성이 돋보인 작품들을 차례로 발표하면서 화단에 호평받게 됩니다.

질문6 : 김기창 화백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은 어떻게 말을 합니까?

답변 : 김기창 화백 사후에 화단의 전문가들이 분석을 해 놓은 것을 봤는데요.
전문가들은 김기창 화백의 작품은 대략 다섯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초기는 사실적 작품을 그린 구상미술 시기, 그리고 6.25 때 그렸던 ‘예수의 일생’연작은 한국인의 모습으로 담은 신앙화 시기로 구분하고요.

세 번째 단계는 구상미술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복덕방 연작 시기, 네 번째 시기는 청록 및 바보 산수화 시기, 그리고 말년은 추상미술 시기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화단에서 김기창 화백의 작품에 대한 견해들은 산수화, 인물화, 풍속화, 꽃을 그리는 화조, 부엉이와 같은 새를 그리는 그림에도 능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고요.

작품 형태는 대담하게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있고,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가로 대한민국 화단에서는 꼽고 있습니다.

질문7 : 김기창 화백의 부인 박내현 화백이 세상을 빨리 떠나지 않습니까?

답변 : 그렇습니다. 화단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자였던 박내현 화백이 1976년, 57세 나이로 타계하자 김기창 화백은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고 주변에서는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화백 김기창 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 바로 부인 박내현 화백과 사별 이후였다고 합니다.

부인 박내현 화백을 기려 성북동에 부인의 아호를 딴 ‘운향 미술관’을 세우고 6.25 당시에 그렸던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갖는 등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고요.

그 이후에는 청소할 때 사용하는 대걸레로 작업을 해서 내 놓은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질문8 : 김기창 화백 생전에 TV나 언론에 인터뷰할 때 보면 그의 아호를 딴 ‘운보의 집’에서 인터뷰를 했던 장면들이 떠오르는데요. 운보의 집은 어떤 곳인지 궁금하네요?

답변 : 운보의 집은 김기창 화백의 어머님의 고향인 충북 청주에 있는 곳인데요.
부인 박래현 화백과 사별한 이후 많이 힘들었다고 앞에서 언급해 드렸잖아요. 그래서 김기창 화백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이곳에 정착해서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 전념하시던 곳, 돌아가실 때까지 이곳, 운보의 집에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1984년 운보의 집을 완공했는데요. 저도 TV로 몇 번 봤는데, 우리 전통 양식의 한옥을 중심으로 운보미술관과 운보 공방, 분재 난 전시장, 야외 도자기, 수석공원, 3개의 연못, 분수대 등이 자리하고 있고요. 정자와 돌담, 연못의 비단잉어가 잘 조화되어 있어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특히,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자락 3만여 평에 달하는 운보의 집은 문화예술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어서요. 이제는 지역사회의 명소로 알려져 있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기도 합니다.

언론이나 직접 가보셨던 분들의 증언을 보면 운보의 집은 그야말로 수려한 자연경관과 전통한옥이 잘 어우러진 문화 예술공간이라고 했습니다.

이중 운보 공방은 청각장애인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곳으로, 청각장애인의 자립생활과 권익옹호에 앞장선 김기창 화백의 또 다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질문9 : 운보의 집은 문화예술공간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운보문화재단도 있지 않습니까?

답변 : 그렇습니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전 생애에 걸쳐 한국 미술 문화의 발전에 기여해 왔고 한국화를 정립하는데 뚜렷한 공적이 있는 분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후학을 배출하는 등 교육 활동에도 기여하였기에 이러한 김기창 화백의 예술혼을 계승 발전시키고 미술인구 저변확대를 목적으로요. 김기창 화백이 돌아가신 직후 바로 운보문화재단을 설립됐습니다.

더욱이, 김기창 화백은 청각장애인이었지만 그의 강한 정신과 의지로 예술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기에 이러한 불굴의 의지와 정신에 대해 작금의 젊은이들이 본받을 점이 매우 많고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그의 작품에 대해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데 운보문화재단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해서 설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질문10 : 운보문화재단의 주요사업에 대해서도 설명을 좀 부탁드릴까요?

답변 : 운보문화재단의 주요 사업은 크게 미술관 운영 사업과 장학 사업으로 나누는데요.

미술관의 운영은 미술품을 포함한 훌륭한 작품 전시를 통해 대중들이 그 속에서 미술품과 만나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데요. 단순히 미술품 전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해서 대중교류의 장, 사회 교류의 장으로 확대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운영을 하고 있고요.

그리고 장학 사업은 재단 수익을 사회 환원측면에서 한국 미술계를 이끌고 나갈 유능한 인재 발굴, 육성을 목적으로 재능 있는 화가 지망생과 특히, 환경이 어려운 청소년 장애학생들을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질문11 : 청각장애인이었던 김기창 화백은 본인과 같은 장애를 가진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많은 사업들을 해 오셨다고 하셨는데요.

답변 : 앞서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본인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기에 직접 장애인 사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청각장애인 복지를 위해 한국농아복지회를 창립해서 초대회장을 스스로 지내셨고요.

그리고 세계 스케치여행을 하던 중 선진국의 청각장애인 복지시설을 직접 돌아보면서 낙후된 국내 청각장애인 복지시설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이 회장으로있던 한국농아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키는 열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인을 위한 이용시설 청음회관을 개관해서 많은 청각장애인들에게 필요한 지원사업을 지금까지 해 오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청각장애인 이용시설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반은 정부나 누구도 해 보지 못한 가운데 김기창 화백께서 하셨다는 점입니다.

질문12 : 김기창 화백은 본인의 장애에 대해서 혹시 언급한 적이 있습니까?

답변 : 운보의 집에 보관된 운보 어록을 살펴보면요.

나는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불행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듣지 못한다는 느낌도 까마득히 잊을 정도로 지금까지 담담하게 살아왔습니다.

더구나 요즘같이 소음공해가 심한 환경에서는 늙어갈수록 조용함 속에서 내 예술에 정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이미 고인이 된 아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게 유감스럽고 또 내 아이들과
친구들의 다정한 대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는 것이 한(恨)이라면 한(恨)이지요.

이 내용을 보면 가슴이 좀 먹먹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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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빈 기자(marchy@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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