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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사랑 | yoons's blog
♣'강해)'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히 5:12-14)
2018-06-13 오전 6:48:00
조회 105

39강.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 (히 5:12-14)


강해:정낙원 목사


성경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주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교회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 예수님은 언약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제가 성경을 풀어 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는 예수님입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만물은 예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닫으면 인간들 이야기가 주제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열면 인간은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성경을 통하여서 무슨 말을 하시고 계신가 들어야 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서 말씀하셨고,

신약은 구약에 약속이 되었던 그 예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그리곤 신약에선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시려고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곤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장차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인간들 세계에선 황당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은 내가 어떻게 살까 에만 관심이 있지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잖아요.

오로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까 고민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아무리 예수님이 어떻고 약속이 어떻고 하여도 관심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도에겐 성령이 임하셔서 내가 어떻게 살까 라는 관심사를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돌리게 하세요.

그러니 성도는 세상에선 이방인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린 모두가 성령을 받기 전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어요.

아니 의식조차도 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살기도 바쁜데 전혀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을 생각하게 한단 말이에요.

 

이게 생각이 안 나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거든요.

무시하고 살면 뭔가 찜찜하고 개운치가 않아요.

마치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고 뒤처리를 안 한 것과 같이 찜찜하단 말이에요.

그러니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없고 버리자니 찜찜하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신자들만이 갖는 생각이에요.

 

저도 만약에 예수가 생각이 안 나면 예수를 안 믿겠어요.

안 믿으려고 해도 생각이 나니 안 믿을 수가 없어요.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에요.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것이 쉬워요.

 

예전에 이런 CF가 있었지요.

남자가 여자를 안고 가! 가란 말이야!

널 만나서 도대체 되는 일이 없어! 가란 말이야! 가! 라고 하는 광고 생각나세요.

아마 전지현이가 나오는 것 같은데!

 

저는 그 광고를 보면서 예수님을 연상을 했어요.

예수님이 그 여자와 같이 착 달라붙어서 사람을 귀찮게 해요.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고 찰거머리 같이 달라붙어서 사람을 힘들게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것이 예수님이 제가 가라고 하여서 갔으면 어찌 할 뻔 했어요.

우리 예수님께서 찰거머리와 같이 달라붙어서 떠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겁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가 가라고 한다고 해서 가셨으면 어찌 할 뻔 했습니까?

그렇게 구박을 해도 진드기 같이 달아 붙어서 떠나지 않는 것이 축복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함과 상관이 없이 일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야곱을 보세요.

타관객지에서 그 고생하여서 성공하고 귀향하잖아요.

수 십년 동안 하나님을 잊은 듯이 살았는데 하나님은 한 번도 잊지 않고 계셨잖아요.

그리곤 얍복강에서 야곱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치기 해 버립니다.

야곱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이 착 달라붙어서 야곱 속에 심어 놓은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성도)은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가는 도구에 지나지 않아요.

 

성도의 구원은 우리 쪽에서 결정되지 않고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을 하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우린 변덕이 죽 끓듯 하는데 예수님은 일향 미쁘셔서 변덕이 없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끝까지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러한 사고로 성경을 보게 되면 얼마나 편하고 감사한지 몰라요.

오늘 본문도 이런 사고로 보시면 큰 은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오해를 낳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목사님들은 이 말씀으로 성도들을 믿음이 성장해야 하는 것으로 강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목사님들로부터 조금이라도 게으르거나 열심이 없으면 언제까지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라고 책망하는 말들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겁니다.

저도 과거에 많이 들어 보았어요.

 

이 시대 신앙이 좋다 나쁘다 를 판단하는 근거는 인간의 열심과 충성이잖아요.

율법적으로 열심히 하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믿음 없다고 하잖아요.

이 시대 교회 안에선 십자가를 알든 모르든 열심만 있으면 일단 믿음이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교회라도 빠지고 교회가 정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면 목사님들이 이런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열심을 내라고 소리를 치는 겁니다.

저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이런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조금만 본문을 눈여겨보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라는 말씀이 아님을 알 수가 있어요.

 

본문을 가장 쉬운 표준 새 번역본으로 볼게요.

 

히 5:11-14= “멜기세덱을 두고서는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여러분의 귀가 둔해진 까닭에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12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다시금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어린 아기이므로, 옳은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14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그렇게 교회에 오래 다녔으면서도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한 마디로 예수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이지요.

예수를 모른다는 것은 극단으로 말하면 구원 받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제가 교인들에게 잘하는 말이에요.

저는 교인들에게 제발 교회 다니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해요.

사람들은 교회 다님은 곧 예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교회 다니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교회는 내 의지로 다닐 수가 있지만 예수는 내 의지로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셔야지 만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의지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요.

다만 우리가 그렇게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감사하여야 하는 일입니다.

이미 이루어주신 구원을 알아가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물론 깨닫는 것만큼, 깨달을 때만 기쁨과 감사가 나오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이미 얻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지 얻으려고 조마조마 하면서 가슴 졸이는 것이 아니에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성경의 용어들을 문자적으로 인간의 상식으로 해석을 하면 오늘 본문은 여지없이 사람의 성장에 맞추어서 설교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이성으로 상식으로 성경이 해석이 되면 그건 교훈이에요.

 

그러나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에요.

구원 이야기이고 천국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 받을 자만 이해가 되게 하려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한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문자적으로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말씀을 보면 언제까지 젖이나 먹고 있을 거냐!

언제 장성할래!

그 따위로 신앙생활을 해서 천국이나 가겠냐! 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어떤 분이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제게 메일로 보내서 비평을 좀 해달라고 했어요.

거기에 보면 위에 언급한 내용이 있어요.

그 목사님은 젖이나 먹고 자라지 않으면 하나님이 잘라 낸다고 해요.

키워줄 때 커야지 크지 않고 있으면 하나님도 갖다 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식 키우는 비유로 해요.

자식도 어렸을 땐 부모가 도와서 키워주지만 어느 정도 크면 스스로 알아서 커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모 속 썩이는 자이니 내어 쫓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설교를 한 목사님은 전부 인간이 해야 하는 식으로 성경을 풀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은 없고 인간이 해야 하는 행함만 강조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조마 조마 해서 예수 믿는 것이 불안하고 힘들어요.

언제 짤릴지 모르는데 어찌 죄사함의 안식과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고 누리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 목사님은 보내주신 설교로 비평한다면 복음을 모르는 분이라고 했어요.

제게 상담을 하신 분도 제 글을 보고 이제 복음에 대해서 눈이 떠지니 자기교회 목사님이 하는 말이 순 엉터리라는 것이 보여지는 겁니다.

그러니 답답해서 메일로 상담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보니 어린아이가 되어서 자라지 않으면 전부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전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은 속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다른 말로 소경이란 뜻이에요.

그러니 사기 당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열심으로 믿음을 판단하고 있어요.

믿음과 열심은 달라요.

열심은 내게 속한 것이지만 믿음은 주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에요.

 

믿음이 없어도 인간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열심을 낼 수가 있어요.

열심은 신앙의 가늠자가 아니에요.

신앙의 척도는 믿음이에요.

믿음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열심을 강조하는 것은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에요.

안 믿어지니 자기 열심으로 믿음을 대체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믿어지면 감사하며 살 수가 있는데 이게 안 믿어지면 마음이 불안하고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없애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을 내 보세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불안과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아요.

 

두려움은 믿어지는 믿음이 오면 자연스럽게 사라져요.

마치 칠흑 같은 어둠도 빛이 비취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과 같아요.

마음에 복음에 광채가 비취면 구원에 대한 염려와 불안과 걱정들은 간곳없이 사라져요.

이런 상태를 빛에 속한 자는 어둠에 다니니 아니한다고 하는 겁니다.

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해요.

 

신앙이란 옳으냐! 그르냐!

맞냐! 틀리냐! 이지 얼마나 열심히 있느냐! 없느냐! 로 따지지 않아요.

하루 믿어도 맞으면 천당에 가고, 백년 믿어도 틀리면 헛것이고 지옥행이에요.

 

마치 시험지의 채점은 정답이냐 오답이냐를 가지고 하지 누가 글씨를 정성스럽게 잘 썼느냐 로 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정성스럽게 써도 틀리면 점수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답은 옳고 그름으로 정하지 열심이나 정성으로 정하지 않아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어린아이냐! 장성한 자냐! 라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신앙 년 수가 많으냐! 작으냐! 로 따지는 것도 아니고,

직분이 목사냐! 평신도냐! 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에 관하여서 아느냐! 모르느냐! 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멜기세덱을 알면 분별을 하는 장성한 자이고, 모르면 분별치 못하는 어린아이란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멜기세덱에 관하여 성도들이 알기를 바랍니다.

지금 식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바라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야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가 있어요.

멜기세덱을 모르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어요.

이는 멜기세덱 속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셨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일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 살펴보았듯이 멜기세덱은 포로로 잡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해내시는 분입니다.

우린 그냥 포로였을 뿐인데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셨어요.

 

그러니 성도의 구원 속엔 우리가 지키고 이루고 쟁취할 것이 없어요.

쉬운 말로 우린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됩니다.

이게 멜기세덱 속에 담겨져 있는 성도의 구원에 비밀이에요.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우리더러 이 사실을 알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멜기세덱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면 장성한 자이고 모르면 어린아이란 말입니다.

장성한 자는 답을 바로 적은 사람이고, 어린아이는 답을 잘못 적은 사람이에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오신 예수님을 모르면 사람이 지어낸 말을 따르게 되어 있어요.

즉 목사님들이 거짓말을 하는데도 모르고 따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관하여 아는 성도는 목사님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요.

도리어 사기 치지 말라고 해요.

멜기세덱이 누군지 모르니 본문을 가지고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해도 속는 겁니다.

 

이 시대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의 성장을 보면 평신도에서 권찰로, 권찰에서 서리 집사로, 서리집사에서 안수집사로, 안수집사에서 장로로 나아가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어요.

평신도에서 장로가 되기까지는 엄청난 물질과 피와 땀이라는 충성과 헌신을 요구받게 됩니다.

주일성수는 기본이고 갖가지 헌금에다가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하는 일들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해요.

 

이명박 대통령이 소망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위해서 주일 성수는 물론이고 각종 교회의 행사 참석과 주차장 주차요원으로 수년을 봉사를 하였다고 하지요.

마치 장로가 되기 위하여서는 거쳐야 할 필수 코스처럼 인간의 행함을 강요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장로가 되려면 열심만 있어선 안 됩니다.

반드시 돈이 있어야 해요.

열심을 10점이라고 하면 돈 내는 것이 90점이에요.

목사에게 순종은 100점이에요.

 

교회에 중직이 되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열심도 있어야 하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어야 하고, 좋은 인품도 있어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목사에게 철저히 순종하는 겁니다.

물론 장로가 되고 나면 목사에게 당한 한을 풀려고 목사를 잡아먹는 살모사가 되어버리지만!

 

그러니 한국교회 안에선 평신도에서 시작하여 장로나 권사가 되기까지는 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는 풍토가 조성이 되어져 있어요.

그러나 경쟁적으로 목사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겁니다.

 

목사들은 한 단계씩 진급할 때마다 신앙이 자란다고 칭찬을 하잖아요.

한국교회에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열심과 충성이에요.

그러면 쑥쑥 큽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성경은 이런 것을 성장이라고 하지 않으니 말이죠.

전혀 인간의 열심과 충성과 교회를 위한 헌신을 가지고 신앙의 성장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겐 닫힌 문서인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성경을 보고도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어요.

성령을 받지 못하여서 성경이 닫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여서 문자적으로 성장 그러면 열심히 키 컸으면! 키 컸으면! 하는 겁니다.

 

먼저 오해할까봐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이 자라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요.

그러나 그 의미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깊이 알아가라는 차원을 말해요.

자라가라는 말은 철이 좀 들라는 말이에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 할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엡 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깊이 알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안목이 좀 넓고 깊어지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알고 어떤 형편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그런 믿음에 서 있으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은 율법을 예수님이 완성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율법 지킴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이란 말입니다.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안에 있어야 함에도 아직 율법 아래 머물러 있는 다는 것은 불신앙이란 말이에요.

신앙과 불신앙을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성장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신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율법을 붙잡을 이유가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율법 신앙을 붙잡고 있는 겁니다.

이건 아니란 말이에요.

 

만약에 우리더러 성장하라고 한다면 성장하는 방법론을 강구하게 되어요.

이 시대 목사님들은 이것을 알려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더러 성장하는 비결을 말해준 적이 없어요.

 

흔히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하니 성장하는 것이라고들 생각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많이 알아간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을 많이 알아가는 것을 성장이라고 한다면 구태여 반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오늘 본문처럼 진짜냐! 가짜냐! 를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로 말하는 것을 믿음이 성장하는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반대에요.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만약에 믿음 성장 프로그램이 있다면 많이 자란 자와 적게 자란 교인들 간에 차등이 생기고 차등이 생기면 자연히 서열이 정해지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교인들 간에 마치 조폭들 세계에서처럼 넘버 원, 넘버 투, 넘버 쓰리,,,,,

이런 식으로 위계질서가 세워진단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이런 구조로 되어 있잖아요.

목사는 넘버 원이고,

장로는 넘버 투이고,

안수집사는 넘버 쓰리이고,

평신도는 시다바리잖아요.

이게 무슨 교회입니까?

마피아 조폭 집단이지!

 

그러니 교회 안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인간의 열심과 충성만 난무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교회이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에요.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느냐 하면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몰라서 그래요.

히브리서 식으로 말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서 그렇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니 신앙이 엉터리로 전락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열심을 믿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고 다 이루셨어요.

그럼에도 십자가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고 사람의 가르침에 매여서 종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뭘 하라는 것이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겁니다.

물론 이 믿음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에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는 어린아이와 장성하다는 것은 존재론에 관한 이야기에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요.

수준으로 말하면 어른과 어린아이가 차이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존재론을 말하면 어른이나 어린아이나 차이가 없어요.

 

마치 우리나라 사람과 외국인을 따질 땐 어른이냐 어린아이냐 로 따지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이냐 아니냐 로 따지는 것과 같아요.

어른이라 할지라도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외국인이에요.

하지만 갓 태어난 신생아라도 출생신고만 되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아요.

 

지금부터 이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으세요.

 

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로 보아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멜기세덱을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에요.

왜? 멜기세덱을 모르면 어린아이(불신자)이고 왜? 멜기세덱을 알면 장성한(신자) 자인가요?

그만큼 멜기세덱 속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멜기세덱은 신비한 분이에요.

마치 예수님이 신비한 것처럼 말이에요.

 

육에 속하였으면 예수님은 뻔히 보고도 몰라요.

예수님의 형제들은 30년 동안 예수님과 한 솥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몰랐어요.

그만큼 예수님은 육으로는 가려진 분이란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과 육적으로 형제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구주임을 모르면 영적으로는 남인 겁니다.

 

멜기세덱도 그래요.

그래서 본문에서 책망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토록 말씀을 들었으면 이젠 알만도 할 텐데 아직도 모르는 것을 보니 어린아이(불신자)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멜기세덱이 신약 적으로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를 알면 장성한(신자) 자이고, 모르면 어린아이(불신자)란 말입니다.

예수를 아느냐 모르느냐 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아느냐 모르느냐 로 따지잖아요.

그러니 십자가의 비밀을 알면 장성한(신자) 자이고 모르면 어린아이(불신자)에요.

 

안다! 모른다! 를 지식으로 보지 말고 영이냐! 육이냐! 라는 영역으로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면 영에 속한 사람이고, 모르면 육에 사람이에요.

영에 속한 사람은 은혜 아래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은 율법 아래 있어요.

 

멜기세덱을 알면 영에 속한 사람으로서 은혜 아래 있고, 모르면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알므로 장성한 사람이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모르니 어린아이인 겁니다.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을 안다 모른다 를 예수 안이냐! 바깥이냐! 로 표현을 해 봅시다.

그러면 예수 안에 있으면 다 장성한 자이고, 예수 밖에 있으면 다 어린아이인 겁니다.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어린 아이들처럼 마귀의 노리개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안이다! 예수 바깥이다! 는 우리 열심으로 영역을 오갈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옮겨 주셔야만 해요.

그러니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선택된 성도는 예수님이 알아서 예수 안으로 옮겨주세요.

 

그러면 성경이 어린아이와 어른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이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갈라디아서를 보아야 해요.

 

갈 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자! 눈여겨보세요.

바울은 성도의 신분을 종과 아들로 표현하고 있어요.

아들이 분명한데 어렸을 땐 종처럼 있었다고 하지요.

 

1절을 보면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라고 하지요.

여기서 주인이란? 아들이란 말이에요.

아들이 어려서 종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건 마치 왕자가 어려서 스승에게 훈육을 받는 것과 같아요.

왕자라 할지라도 어렸을 땐 말 안 들으면 스승으로부터 회초리도 맞고 꾸지람도 듣는 겁니다.

그러다가 크면 스승과 자기는 신분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스승을 다스리잖아요.

 

바울이 지금 성도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아들이 어려서 청지기 아래서 종처럼 부림당하지만 원래부터 아들이란 말입니다.

종이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은 비록 어려서 종처럼 살고 있지만 아들이란 말이에요.

분명히 아들인데 어려선 종처럼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 3절을 보면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아들을 종처럼 살게 해 두셨다고 하지요.

어렸을 땐 세상 초등 학문아래서 종노릇 하게 하였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두셨어요.

그런데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 한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율법 아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이게 신앙의 본질적인 싸움에 근간이 되어요.

신앙생활의 싸움은 전부 이 싸움이에요.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느냐?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는가?

모든 사람은 이 두 영역 안에 있어요.

 

아담 안은 율법이 지배하고,

예수 안은 은혜가 왕 노릇해요.

율법 아래 있으면 내가 뭔가 지키고 이루어가야 하지만,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으면 예수님이 대신 지켜주신 것으로 살아요.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룰 것이냐! 예수님이 대신 이우어주셨는가의 싸움인 겁니다.

 

그러면서 4, 5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율법(아담 안)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고 하지요.

이는 율법이라는 동네에 있던 자기백성들을 아들의 나라로 옮겨 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죄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 온 겁니다.

그래서 이젠 율법이라는 저주 아래서 살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아들의 나라에서 아들에 명분을 얻고 살아가는 아들(양자)이라고 하는 겁니다.

 

성도는 아들에 영을 받아서 아들의 명분을 얻은 아들들이에요.

진짜 아들은 예수님뿐이에요.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아들로 대우를 받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아들(예수님)의 영(靈)을 받아서 양자(養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바울은 지금 종과 아들이라는 것을 율법과 은혜 또는 행함과 믿음이라는 영역으로 비유하여서 성도의 구원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멜기세덱 안에 있으면 장성한 자이고 멜기세덱 밖에 있으면 어린아이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행함) 아래 있으면 어린아이고, 은혜(믿음) 아래 있으면 장성한 자에요.

 

성도는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으로 구원이 되었어요.

선택당한 상태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미 천국 백성인 자로서 죄 아래서 태어나요.

태어나서 앞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아서 천국 백성으로 만들고, 지옥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천국 백성과 지옥백성으로 태어나요.

마치 에서와 야곱처럼 말이에요.

에서와 야곱의 운명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결정이 났어요.

태어나기 전에 결정이 되었다는 것은 야곱이나 에서의 행동 여부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 태어났고,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 태어난 겁니다.

에서는 에서로 태어나고, 야곱은 야곱으로 태어났어요.

살아가면서 에서가 야곱이 되고 야곱이 에서가 되는 것은 없어요.

 

알다시피 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서 지옥가기로 태어났고, 야곱은 긍휼의 그릇으로서 천국 가기로 태어났어요.

그러니 야곱이 잘못했다고 지옥으로 가고, 에서가 잘했다고 천국으로 가는 것은 없어요.

 

흔히들 목사님들이 그 따위로 해서 천국 가겠나! 라는 말은 틀린 말이에요.

이건 공갈치는 겁니다.

그 따위로 해서 천국에 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여기서 그 따위란? 신앙생활 잘해서 란 말이잖아요.

 

목사님들이 그 따위로 신앙생활 할래! 라는 말은 신앙생활이 정형화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목사가 정한 기준에 차야 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목사 눈에 차야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되어요.

그런데 목사 눈에 차서 천당 간 사람이 없어요.

 

천당은 목사 눈에 안 차도 예수님이 부르시면 가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듯이 너 이리 와서 천당에 가! 그러면 꼼짝없이 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예수님의 선택이에요.

 

이처럼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천국으로 갈 자와 지옥으로 갈 자로 태어나요.

그런데 둘 다 아담 안이라는 죄 아래서 태어나요.

천국 갈 자는 죄 아래서 건짐 받는 겁니다.

 

그러니 죄 아래서 태어나도 야곱은 천국 백성이고 에서는 지옥백성이에요.

둘 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니 죄의 종이지요.

에서도 죄 아래서 태어나 죄의 종이고, 야곱도 죄 아래서 태어났으니 죄의 종이에요.

 

죄 아래서 태어난 것을 본문에선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하고 율법의 종이라고 해요.

그래서 바울은 야곱과 같이 천국의 아들들이 어렸을 땐 율법 아래서 종처럼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한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종노릇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 아래서 종노릇한 겁니다.

바로는 율법과 같아요.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으로 하나님 백성 된 자들이 율법 아래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바로 아래서 벌벌 떨고 있지만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이해되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때가 차매 바로(율법) 아래서 빼냈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 빼냈다는 것은 은혜 아래로 옮겼다는 겁니다.

애굽은 자기 노력으로 자기 수고로 살아가는 율법이라는 동네에요.

그러나 광야는 하늘에서 주는 것을 얻어먹고 사는 은혜라는 동네에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율법이라는 영역에서 은혜라는 영역으로 영역을 옮겨 준 겁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그랬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贖良)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말이에요.

속량(贖良)이란? 사전적 의미로 돈이나 곡식을 내고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을 말해요.

 

이걸 성도의 구원이야기로 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성도를 빼내오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값을 치루셨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겁니다.

이걸 이사야서 53장에선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다고 했어요.

그러니 성도가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오는데 예수님의 목숨을 주고 데리고 온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던 자기 아들들을 빼내 오려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찾아 온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예수님의 목숨을 담보로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 목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목숨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우린 율법에서 은혜로 건너 올 때 이미 죽었어요.

성도에겐 율법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옮겨 올 때 그냥 옮겨오지 않고 어린 양이 희생당하는 댓가로 옮겨진 겁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은혜라는 동네로 옮겨오기 위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 아래 있는 성도에겐 예수님의 피가 발려져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율법에서 은혜로 건너 왔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간다고 하면 예수님은 헛 죽은 것이 되고 말지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3-2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보세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었다고 하지요.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율법 아래 갇혔다고 하지요.

 

그럼 믿음이 언제 주어집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주어지지요.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믿어지게 해 주시잖아요.

믿음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우리의 신앙으로 말해 볼게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태어나요.

즉 율법으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이 되어진다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적용을 하여서 믿음의 세계로 영역을 옮겨 주셨어요.

이젠 아담 안이라는 율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예수 안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세계로 이사를 시켜준 것입니다.

 

율법 아래선 내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일을 해서 살았는데, 믿음 아래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지켜준 것을 혜택을 입고 사는 것이에요.

이는 마치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얻어먹고 사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믿음이라는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가 지켜야 할 말씀이 없어요.

다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살아요.

 

예수 안에서 죄란?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 지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들은 율법 신앙과 처절할 정도로 싸우는 겁니다.

율법 신앙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 아래서 있는 것을 어린아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란? 아들이 아니고 종이란 뜻이에요.

율법은 종의 영역이고,

은혜는 아들의 영역이에요.

 

바울은 다메섹 이전과 이후로 자신의 신앙영역을 그리스도 밖과 그리스도 안으로 표현했어요.

다메섹 이전에 율법에 특심할 때는 그리스도 밖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율법 신앙은 예수 밖이라는 영역인 겁니다.

 

바울처럼 창세전이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는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안으로 옮겨 주어요.

선택당하지 않는 자는 그대로 율법 아래 머물게 합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 가서 율법에서 빼내주셨어요.

 

여러 사람이 함께 갔지만 바울에게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빼내 준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율법에 갇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렇게 차별적으로 일하시느냐 하면 바울만 선택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예수님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백성들만 율법에서 빼내 주세요.

 

제가 놀라는 것이 이것이에요.

전 수십 년 동안 율법아래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저와 같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 중엔 아직도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사람이 있어요.

함께 교제하던 목사님들 중에도 아직도 율법으로 목회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런 분들을 보면 비판하기에 앞서서 내가 저런 동네에서 건짐 받았다는 것에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주께서 내 눈과 귀를 여시지 않았으면 나도 지금껏 율법아래서 열심히 특심한 모습으로 어리석은 자들이 훈도가 되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을 것 아닙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우린 복음을 안다는 것에 감격하여야 해요.

감격하라고 율법 아래서 빼내 주신 것이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라고 빼내 준 것이 아니에요.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보면서 비판하지 않았어요.

차라리 자기 하나 지옥가고 모든 동족들이 천국가기를 바랬어요.

 

남을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자기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나는 아는데 넌 왜? 모르느냐? 라고 깔보고 힐난하는 겁니다.

이건 구원이 은혜로 주이진 것임을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진짜 은혜로 구원이 된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을 보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앞서요.

아! 저 사람도 나처럼 복음의 광채가 마음에 비췄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바램이 앞서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면 기다릴 줄 알아져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실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에요.

 

스데반 집사처럼 저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런다고 용서해 달라고 해요.

은혜 안에선 비판이나 정죄가 없어요.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정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금 정죄당하는 영역에 있다는 증거에요.

자기 안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제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그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 능력이나 되는 듯이 남을 난도질하는 사람들이에요.

복음을 깨달은 것이 자기 실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서슴치 않는 겁니다.

 

예수님이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했지요.

어떤 왕이 일만 달란트(백억)을 빚진 종을 탕감해 주었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백만 원)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옥에 가두지요.

이를 보고 왕이 그 사람을 불러서 다시 빚을 갚으라고 옥에 가두어 버리잖아요.

 

얼른 들으면 조건부 탕감 같지만 이는 조건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탕감 받았음에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를 판단하는 겁니다.

진정으로 내가 율법 아래 종노릇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알고 구원을 받았음을 안다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무시하고 정죄하여선 안 된다는 겁니다.

도리어 탕감 받은 기쁨으로 그들을 위하여 주여 저들도 복음을 알게 해 주옵소서! 라는 긍휼의 마음이 나와야 정상이에요.

 

예수님이 지금 탕감 받은 종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탕감 받은 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죄사함 받은 줄 아느냐!

그러면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은혜라는 영역에 있는 사람은 은혜와 긍휼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내 안에서 이런 것이 안 나온다면 뭔가 잘못 된 겁니다.

법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쌓고 있기 때문에 정죄와 비판이 나오는 거예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 갇혀 있는 자들이었어요.

바울의 고백대로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때가 되어 우리를 율법 아래서 빼내 주셨어요.

우린 다행히 빼내 주셨지만 아직도 빼내심을 입을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그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도 다 그런 연유에서 에요,

누가 하나님이 정한 때와 맞닥뜨릴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제가 요즘 들어서 또 실감해요.

지난 몇 개월 동안 저의 블로그에 매일같이 7, 8천명씩 때론 만여 명씩 다녀갔어요.

블로그 개설한지 1년 만에 백만 명이 다녀갔어요.

그러다가 지금은 하루에 십분의 일로 뚝 떨어졌어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 분들이 블로그에 글을 보고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감사해요.

또 좋은 글을 써주셔서 고맙다는 전화가 많이 와요.

 

등 떠밀려서 블로그를 개설했는데 많은 분들이 복음을 알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이는 모두가 하나님께서 때를 맞추어서 일을 버리신 것이에요.

그러니 저 같이 무식한 사람의 글을 보고서 복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때가 되시매 사건을 벌리신 겁니다.

 

알다시피 제 글이 군더더기가 많고 유치하잖아요.

식자(識者)들이 보면 한 이야기를 또 하고 해서 지루하고 짜증날 겁니다.

어차피 복음을 아는 분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볼 필요가 없어요.

저 처럼 율법아래서 종노릇 하던 분들이 보고서 복음을 깨닫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율법 아래 있던 분들이 복음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어서 쉬워서 좋다고 해요.

어려운 미사여구(美辭麗句)를 써서 알아먹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쉬운 글로 알아먹게 하는 것이 좋다고 저는 그렇게 쓰는 겁니다.

 

전 어떻게 하든지 쉽게 쓰려고 해요.

하나님이 하루 하루 우리를 어떻게 다루어 가시는지 간증 적으로 쓰고 있어요.

성경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일상 속에서 희노애락(喜怒哀樂)하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조근 조근 이야기하듯이 글을 쓰는 겁니다.

어디 학위 받으려고 논문 쓰는 것도 아니니까 어렵게 쓸 이유가 전혀 없어요..

 

복음은 쉬워야 해요.

복잡하면 안 되어요.

어렵게 할 이유가 없어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이해되도록 하면 되어요.

그래서 복음을 들으면 수가성 여인처럼 나 예수 만났다! 그런 고백들이 터져 나와야 해요.

 

수가성 여인처럼 예수를 만나면 율법에서 나와 은혜 안에 들어온 장성한 자가 되는 겁니다.

어느 날 율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옮겨졌어요.

자고 나니 스타가 되었다고 하듯이 어느 순간 은혜 아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열심히 뭔가 해서 크고 자라야 한다는 개념이 아닌 것이지요.

율법 아래 있으면 어린아이 같이 속아 살지만, 은혜 아래 있으면 어른들처럼 분별을 하니 속지 않는 겁니다.

그럼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그 사정을 알아봅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인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 들였어요.

갈라디아 지역에 있던 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모두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서 죄사함을 얻는다는 믿음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바울이 없는 틈을 타서 유대교 거짓선지자들이 예수 믿고 자유롭게 사는 성도들을 보고 자기들 종으로 삼고자 다른 복음으로 미혹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마귀에게 속한 유대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다른 복음이란? 예수만 믿어선 안 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해도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그들의 교훈을 따르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기 시작한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 지려고 한 겁니다.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잖아요.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이에요.

율법 속에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가 있어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것을 지킬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을 당해서 율법신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화가 나서 누가 너희를 꾀더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에 밝히 보이는데 왜?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느냐! 라고 대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과 같아요.

거짓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잖아요.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처럼 거룩해 져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이렇게 되면 인간이 거룩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거룩해지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란? 예수 안이라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지, 인간들의 개과천선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거룩한 자이고, 예수 밖은 무조건 부정해요.

 

그럼에도 성화론자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거룩해 진다고 가르치잖아요.

누가 잘못이라고 하면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이젠 예수 믿는 자 답게 올바른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잖아요.

 

이들이 말하는 올바른 인간이란 고작해서 선악의 법아래서 말하는 선한 삶을 말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선악 자체를 악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성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선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 앞에선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선(善)은 오직 예수 안만 선이에요.

 

특히 성화론자들은 십자가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라고 주장합니다.

아직도 십자가만 붙잡고 있느냐!

이젠 십자가 너머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야지! 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사람들은 부활의 세계가 어떤 곳인 줄을 몰라요.

그냥 입으로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하면 부활신앙인줄 알아요.

 

부활의 세계란? 십자가 너머의 세계에요.

즉 아담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로 넘어간 거예요.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 갔다는 말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세계에요.

부활의 세계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없어요.

부활의 세계는 율법 지킴과 상관이 없는 세계에요.

거기는 율법은 있으나 기능이 달라요.

 

부활의 세계는 너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혼난다! 그런게 없어요.

다만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닫게 되어요.

야! 내가 이런 죄인인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살고 있구나 를 알게 되고 감사하게 되어요.

 

그러니 부활의 세계에선 율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더 빛나게 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율법으로 복음에 진가를 더 만끽하라는 거예요.

그러니 율법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고 감사하게 하는 복음이 되는 겁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용서 받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만들어줘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율법이 복음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은혜로 잘 살고 있는 성도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려야 한다고 가르치잖아요.

이러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또 짐으로 남아요.

아니! 지금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신나게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다시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지킴의 세계로 끌고 와서 종노릇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화를 내는 겁니다.

 

다시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4:8-20=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이 화는 내는 이유는 왜? 다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느냐! 에요.

왜? 율법을 지키느냐! 에요.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그 모진 고난을 당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한 것은 뭐가 되느냐!

내가 지금까지 헛수고한 것이란 말이냐! 라고 화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고 사는 것을 어린아이들이나 배우는 초등학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왜? 어린아이 시절로 되돌아가려느냐! 이 말이에요.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니 다시 율법이 말하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날과 달과 절기를 폐하셨잖아요.

그런데 다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이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겁니다.

왜? 다시 율법이라는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종노릇하느냐! 이 등신들아! 소리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이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합니다.

 

갈 4:19-20=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하지요.

이는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미를 좀 깨달으라는 겁니다.

왜?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다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하느냐!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보면 거짓 종과 참 종의 차이가 납니다.

거짓 종은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고, 참 종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강조합니다.

거짓 종들은 우리가 아직 뭔가 하여야 하는 것이 남은 것으로 가르치고, 참 종들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으니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요.

 

이렇게 되면 히브리서가 말하는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의 차이를 알겠지요.

이 시대 대 다수의 교회에서 가르치는 장성한 신앙과는 전혀 다르지요.

맞아요.

그래서 소경인 겁니다.

성경을 말하나 성경을 전혀 몰라요.

누가?

목사나 교인들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러니 속고 속임 당하는 겁니다.

이를 두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그러는 겁니다.

결국 둘 다 구덩이(지옥)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히브리서가 말하는 어린아이 신앙과 장성한 신앙의 차이를 살펴봅시다.

그러자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멜기세덱에 관해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할 말이 많은데 듣는 것이 둔하여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하지요.

해석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에요.

 

쉬운 말로 너! 멜기세덱에 대해서 알어!

멜기세덱을 모르는 것을 보니 넌 아직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는 어린아이야!

직설적으로 넌 아직 구원받지 못했어! 그 말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너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어!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르면서 목사 노릇하고 있어! 당신은 소경이야! 그러는 것과 같아요.

멜기세덱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고 있어! 그렇게 된단 말입니다.

 

때가 오래므로 란 말은 요즘말로 너 예수 믿은 지가 3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마치 제가 수십 년간 십자가도 모르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말이에요.

목사들에게 적용하면 교인들을 가르친다는 목사가 십자가도 모르느냐! 이 말이에요.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실제로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고 목사 노릇을 수십 년 하면서도 십자가를 모르는 목사들이 수두룩해요.

 

지금 사도 바울이 한국교회에 나타난다면 그럴 겁니다.

에라이~ 이 등신들아!

너희가 그러고도 목사냐!

너희가 그러고도 장로 집사라고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르는 놈들이 무슨 신자라고 하느냐! 그런 말이에요.

 

천당 좋아하네!

누구 마음대로 천당에 간다고 하느냐!

아니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르는 놈들이 어디 감히 천당에 간단 말이냐! 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 이건 교회의 직분이나 신앙의 연수를 따져서 어린아이다! 어른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십자가를 아느냐! 모르느냐! 로 어린아이다 어른이다 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멜기세덱을 모르면 신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이 시대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면 성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을 아는 것을 장성한 자들이 먹는 단단한 음식이라고 했어요.

멜기세덱(십자가)을 알면 장성한(성도) 자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고,

멜기세덱(십자가)에 대하여 모르면 어린아이(불신자)로서 젖을 먹는 사람이에요.

단단한 음식이란? 영적으로 이해를 하고,

젖이란? 인간의 상식으로 교훈으로 이해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거의가 다 성경을 상식으로 풀잖아요.

너 상식적으로 생각 좀 해 봐라! 그러면서 말이에요.

성경은 상식으로 풀어지지가 않아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상식으로 풀다가 망한 자들이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이 문자적으로 상식으로 예수님을 분석해서 메시야가 아니라고 해서 십자가에 죽은 거잖아요.

 

지금도 동일해요.

상식으로 문자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어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이 십자가를 모르니 하나님 말씀 지켜서 영광 돌리자고 하는 겁니다.

성화하자는 말 자체가 성경의 증거와 다른 비 복음이에요.

 

그만큼 멜기세덱 속에는 비밀이 담겨져 있어요.

이해가 안 되면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멜기세덱을 다시 읽으세요.

어설프게 읽지 말고 찬찬히 읽어서 양식을 삼으세요.

그래야 속지 않아요.

사기꾼들이 너무 많아서 아차 싶으면 속아요.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 목사들은 거의가 다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에요.

멜기세덱 속에 담긴 비밀도 모르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인간의 상식으로 자기 지식으로 교인들을 우롱하고 있는 겁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눈 뜨고 코가 베임 당하는 시대에요.

그만큼 기독교 방송이 마귀의 앞잡이가 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해요.

그래야 속지 않아요.

속는 것은 본인이 어리석어서 그래요.

그러니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씀을 배워야지요.

 

제가 기독교 방송을 잘 안 보아서 100% 라고 말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것을 토대로 말하면 아직까지 십자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목사를 보지 못했어요.

나름대로 십자가를 말하지만 알맹이를 까보면 달라요.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가 아니고 다른 십자가에요.

 

십자가 밖에서 말하는 십자가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인데!

십자가 밖에서 십자가를 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어떤 방법론을 말해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끄집어내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은 십자가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에요.

 

십자가는 인간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인간을 제외시켜요.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에 인간은 할 것이 없다고 말해요.

오로지 예수님 피만 증거해요.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말한 십자가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는데 뭘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진단 말이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날과 달과 절기를 다 폐하셨는데 뭐가 남아 있느냐! 라고 말해요.

 

십자가는 비밀이에요.

물론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비밀이 아니에요.

하지만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접근이 안 되어요.

 

복음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단순하지만 예수 밖에 있는 자에겐 복잡한 미로와 같아요.

어떻게 찾아나갈 찾을 방법이 없어요.

이는 성령으로 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하도록 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그럼 멜기세덱은 누구라고 했나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지요.

제사장은 누구를 위하여 있다고 했습니까?

죄인들을 도우시려고 있다고 했지요.

뭘 돕습니까?

죄 사함을 돕는다고 했지요.

 

히브리서를 봅시다.

 

히 10: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히 9:11-12=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짐승의 제사를 윈치 않고 한 몸을 원하신다고 하지요.

그러니 짐승의 제사는 장차 오실 한 몸을 예표하는 제사이지요.

실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실체는 한 몸이에요.

 

그런데 그 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여기 보세요.

아버지가 책에 기록해 놓은 대로 제가 왔잖아요!

그러는 겁니다.

 

내가 아버지 뜻대로 자기백성들을 위해서 대신 죽어줄 제물이 되려고 왔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서 영원한 속죄를 단 번에 이루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로 좋아서 오셔서 자기 몸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根源)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 5:6-11=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오셔서 한 일이 뭡니까?

자기 몸으로 영원한 구원의 근원(根源)을 만드셨다고 하지요.

근원(根源)이란 뿌리에요.

 

지난 시간 근원을 틀이라고 했지요.

틀이란 고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만 구원을 하시겠다는 말이에요.

 

어떤 방법인가요?

예수의 피로서만 구원을 하신다는 방법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시는 방법으로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성도의 구원은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된 겁니다.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이 되었으니,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은 보장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사는 자가 믿음 안에 거하는 장성한 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로서 맺은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새 언약은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언약이에요.

인간은 제외 되었어요.

 

인간을 제외시킨 것은 인간의 것을 받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새 언약 하에선 인간은 죽은 자에요.

없는 자에요.

하나님 앞에선 오직 예수님 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아들과만 상대를 하세요.

 

내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예수님 피 때문이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해 주신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마귀의 참소로부터 이겨낸다는 것을 믿는 것이 장성한 자입니다.

 

이게 믿어지면 그 어떤 것으로부터 가두어지지 않아요.

누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고 하여도 너나 잘 하세요! 라고 담대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이건 객기 부리는 것이 아니에요.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 의를 쌓고자 하지 않는 겁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한번 들어 볼까요.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베드로는 조상의 유전을 망령된 행실이라고 합니다.

조상의 유전이란? 율법대로 살아가는 신앙이에요.

그러니 율법 신앙은 하나님 앞에선 망령된 행실인 겁니다.

망령되다는 것은 망할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 붙잡으면 죽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망령된 것으로부터 어떻게 구출이 되었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서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다는 말이에요.

 

아주 근원적으로 말할게요.

성도는 구원에 대하여 신경 쓸게 없어요.

구원은 우리 쪽에서 이루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관리하세요.

이게 믿어지면 성도는 고민 할 것이 없어요.

내가 나를 관리 할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우리가 고민하고 염려하는 것은 모두가 쓸데없는 것입니다.

야! 나 이러다가 지옥가면 어쩔까?

야! 나 이러다가 짤리지는 않을까?

이게 모두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자기 생각에 뭔가 미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지옥을 간다고 생각하고 짤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엔 우스운 거예요.

 

이건 마치 강아지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 이러면 쫓겨나면 어쩌지! 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주인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그 강아지를 좋아해서 에요.

싫으면 안 키워요.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이 그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셔서이지 우리에게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무슨 근거가 있는 줄 착각을 해요.

그러니 항상 우리 행동거지로 혼자 판단하는 겁니다.

야! 내가 이러면 하나님이 싫어할 거야!

야! 내가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면 천국에서 제외되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율법에서 해방 되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이런 걱정을 안 해요.

그러니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장성한 사람인 겁니다.

이런 사람은 성화주의자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거룩해져야 한다고 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모르면 어린아이처럼 속는 거지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예수 밖에 있기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고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롭다고 인정을 하세요.

이게 멜기세덱에게 주신 영원한 언약이고 구원의 근원이에요.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엔 일말의 타협이 있을 수가 없어요.

양보 되어질 수도 없어요.

사도나 바울이 이것하나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하나 증거하다가 이단소리 듣는 겁니다.

이 시대 이단 소리 듣는 것은 죽임 당하는 것과 동일해요.

우린 당연히 예수님처럼 이단 소리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듣기 싫어합니다.

말로는 좁은 길을 가게 되어 있음을 알지만 우린 넓은 길을 원해요.

그래서 눈만 뜨면 자기 근거를 넓히려고 해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꿈 꾸는 것이 죄라고 허무는 일을 하세요.

하나님의 창조는 항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세요.

이는 곧 없음에서 있음으로 일하신다는 뜻이에요.

없음에서 시작하면 모두가 감사가 되는데 있음에서 시작하면 있음이 근거가 되기 때문에 항상 비교가 되어서 있음에 미흡할 때는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란 묘해서 움켜잡으면 항상 불안해요.

더 움켜잡아야 하기 때문에 탐욕에 쫓기고, 반면에 움켜잡은 것이 날아갈까봐 또 걱정합니다.

그러니 사면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움켜잡은 것을 놓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세상에선 움켜잡은 것이 있어야 안심이 되거든요.

목사도 믿음이 없으면 교인이라도 움켜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어요.

 

자기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든든함을 느껴요.

그래서 늘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으로 인의 장막을 치고자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그 사람에겐 머리 둘 곳이 없어요.

 

우린 이런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으로 힘을 삼고 살아야 함에도 사람을 힘으로 삼고 살고자 해요.

그러니 사람들이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들을 긍정해주고 기쁘게 해 주어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를 증거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를 늘 없는 자로 돌리기 때문이에요.

죽였다가 다시 시작하게 하거든요.

죽었다가 다시 시작 하게 되면 모든 것이 있음에 감사가 나오지만, 산 자가 되어서 여전히 살아가고자 하면 항상 부족함을 느껴요.

 

성도가 감사를 잊는 것은 모두가 있음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에요.

난 행복해야 돼!

난 잘살아야 해!

난 성공해야 해!

이런 것은 모두가 자기 있음에서 출발하는 죄인의 근성입니다.

 

난 살아야 돼! 라고 시작하니 불행한 겁니다.

그러나 난 마땅히 저주 받을 죄인이야! 라고 시작하면 지금 현실이 다 고마운 겁니다.

사형수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하루 눈을 뜨면 그게 그렇게 고맙다는 겁니다.

아! 오늘도 살고 있구나!

그러면 공기도 하침 햇살도 그렇게 고맙다는 거예요.

 

그런데 같은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사형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하루 하루가 짜증나는 겁니다.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는가? 라고 짜증을 내요.

자기 죄는 생각하지 않고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잖아요.

그러니 만날 눈만 뜨면 감사 대신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겁니다.

모든게 불평불만으로 가득해요.

자기가 죽을 죄인임을 알아보세요.

이런 불평이 안 생겨요.

 

내가 죄인이다!

난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야 함에도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난 행복해야 돼! 라고 생각하니 만사가 불평이고 짜증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행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사실적으로 말하면 자기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은 지금 엄청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말이에요.

부모들이 자식을 비교 할 때도 꼭 잘난 놈들과 비교해서 불평하잖아요.

못난 놈을 비교하는 부모는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두라고 한 것입니다.

낮은데 마음을 두면 모든 게 감사해요.

못난 사람들과 비교해 보세요.

지금 자식이 얼마나 고맙고 대견스러운가를 알게 될 겁니다.

 

목사입장에서 말한다면!

오늘 처음 교회를 개척했다고 생각하면 앉아 있는 분들이 고마울 거예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에 감사가 나올 겁니다.

 

그런데 이미 있는 교인이라 생각하면 에게 이것 밖에 없어! 라고 불만이 생겨요.

왜? 이 사람들 밖에 없느냐! 라고 짜증을 내게 되요.

감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평과 원망이 차지해요.

그러면 목회가 힘들고 재미가 없고 싫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전 하나님 오늘 처음 교회 문 열었습니다! 라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를 해요.

물론 기도한 대로 마음이 먹어지지 않지만 늘 기도는 그렇게 해요.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온 것에 감사가 되고 그 성도가 고마워지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당연히 다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안 나오면 실망을 하고 화가 나요.

 

이게 모두가 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그래서 항상 없음에서 출발하고자 하여도 육신이 말을 들어 먹지 않아요.

기도는 없음에서 오늘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하지만 실제론 달라요.

 

마음으로는 없음에서 오늘 하루도 살아야지 하면서도 눈만 뜨면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 출발을 하니 빼앗길까봐서 불안해하고 더 움켜잡고자 남에 것을 빼앗고자 하이에나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라고 하면서도 마음은 주님 오늘도 나를 폼 나게 좀 해 주세요! 라고 해요.

뭐 이런 괴물이 내 안에 들어 있는지! 놀랄 따름이에요.

 

그래서 전 제 자신도 안 믿어요.

지금 내 신앙도 안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지키고자 하는 신앙은 시절을 좇아서 환경에 따라서 마치 미친 여자 널뛰듯이 종잡을 수가 없이 요동을 치기 때문이에요.

 

어떨 땐 모든 것을 다 초월한 신선이 된 듯 하다가도 어느 때는 탐욕의 악귀가 되어 있어요.

제가 바로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한 마음 속에 살고 있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에요.

베드로처럼 아침엔 주여! 제가 주님을 죽는 데까지 따라 가겠습니다! 해 놓곤 저녁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겁니다.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주님이 섭섭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성도는 이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는 자에요.

내가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그 한계성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에 내게선 의가 나오지 않고 죄만 나온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용서만 크게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감사가 나오고 안위를 받게 되는 겁니다.

 

부디 이 십자가 안에서 자족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은 멜기세덱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로서 완성이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 앎이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 남아서 우리 자신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진 구원의 축복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양)'겸손한 사랑
♣'성경)'행 14: 8- 10 구원 얻을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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