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블뉴스홈으로 가기 검색
╁'성경강해 | yoons's blog
♣(강해)영으로 인도 받는 삶 (롬 8:12-17)
2020-02-19 오전 6:22:00
조회 78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창세전 언약 (에베소서 1장 3-10)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정낙원 목사

 영으로 인도 받는 삶 (롬 8:12-17)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로 합니다.


하늘에 것을 담고 있으면 산 자로 보고, 땅에 것을 담고 있으면 죽은 자로 봅니다.


하늘에 것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는 자라야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보면 두 과실이 있지요.


그냥 과실이 아니고 뭔가 담고 있는 과실이에요.


선악과는 죽음을 담고 있고, 생명과는 영생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는 자가 되라고 알려 줍니다.


그러면서 절대로 선악과를 먹어선 안 된다고 당부 합니다.


그런데 뱀이 아담과 하와의 눈을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선악과에 고정을 시켜서 생명과를 가려 버립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고 그 안에 죽음을 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와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담고 사는 아담을 생명의 동네인 에덴동산에서 생명이 없는 죽음의 동네인 세상으로 쫓아내 버립니다.


그리고 문을 걸어 잠궈 버립니다.


 


이건 마치 사람이 죽으면 공동묘지에 묻고 격리를 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아담을 에덴동산 바깥 죽은 자들이 사는 공동 묘지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문둥병자들을 이스라엘 진 바깥으로 쫓아내는 것과 같아요.


문둥병자는 저주 받은 죄인을 상징해요.


 


아담이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진 바깥으로 쫓겨 난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 진 바깥에서 주거하게 됩니다.


에덴동산 바깥이 이 세상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죽음의 동네에서 자식들을 생산합니다.


하지만 아담 안에서 나온 자식들은 모두가 죽은 자로 태어납니다.


 


아담에게 있어 소망이란? 하늘에 계신 분이 와서 하늘에 생명을 주는 것뿐입니다.


이게 아담에게 소망이고 유일한 희망입니다.


땅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 자체가 죽음의 도시이기 때문에 성공해도 죽은 것입니다.


 


아담은 오매불망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쫓아내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주신다는 그 약속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자식을 낳을 때마다 이 자식이 그 자식인가 기대를 합니다.


 


세월은 흘러 흘러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 하셨던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하늘에 생명을 가진 아들을 보냅니다.


이름하여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하신다고 하는 예수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죽은 세상에 가서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살려 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합니다.


그럼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죽음을 머금고 있는 땅을 떠나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몸은 비록 죽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그 죽을 몸을 살려 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자는 산 자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죽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았다 죽었다 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을 하십니다.  


우린 모두가 죽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생명을 주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의 영을 심어 주셨습니다.


부활의 영이 심겨진 자는 영생하는 자입니다.


 


비록 몸은 죄로 인하여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 있는 부활의 영이 다시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살려 내실 것입니다.


마귀는 죽음을 저주로 생각케 하지만 성령은 죽음을 축복이라고 알려 주세요.


그러므로 성도에겐 육체의 죽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몸을 받는 축복인 것입니다.


 


성도에게 두 몸이 있어요.


흙에서 나서 세상에서 사는 몸과 하늘로부터 나서 하늘나라에서 사는 몸이 있어요.


흙에서 난 몸은 땅에 돌려주어야 해요.


땅에 몸으로는 하늘에서 살 수가 없어요.


하늘에서 살려면 하늘에 몸을 가져야 해요.


 


그런데 하늘에 몸은 땅에 몸이 죽어야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죽을 우리 몸에다가 하늘에 몸으로 살아날 그리스도의 영을 심어 놓았어요.


그리스도의 영은 부활의 영이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는 것을 살펴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더러 “빚진 자”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롬 8:12-17=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러므로” 라는 말은 앞에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앞에서 뭐라고 했나요?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내가 누구인지는 내 안에 거하는 영으로 결정이 되어요.


내가 어떤 인간이냐는 중요치 않아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면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람이에요.


 


이건 마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주어지는 시민권과 같아요.


요즘은 동남아시아에서는 코리안 드림이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나라를 일컬어 꿈을 이루는 나라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코리아는 꿈에 나라 인 겁니다.


 


외국인들에겐 한국 시민권은 축복의 상징이에요.


그래서 위장 결혼을 해서라도 한국 시민권을 얻고자 하는 겁니다.


한국 시민권만 얻으면 마음껏 일을 할 수가 있고 각종 혜택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민권을 한국인에게는 자동으로 주어져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따지지 않고 주어져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따지지 않아요.


장애인이냐 아니냐 따지지 않아요.


남자냐 여자냐 따지지 않아요.


 


지금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이 그러해요.


그리스도의 영만 거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따지지 않아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영으로만 판단해요.


 


내가 비록 육신으로 죄를 짓고 사는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보아요.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로 본단 말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사는 것을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빚을 진 자들이에요.


무슨 빚은 졌나요?


육신의 조건과 상관없이 의인으로 살게 되는 빚을 진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부터 너희들의 조건을 근거로 살지 말고 영으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더 이상 너희들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본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거에요.


이걸 영으로서 몸에 행실을 죽인다고 합니다.


 


몸에 행실을 죽인다는 말은 우리의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영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 꼬라지로 인하여 천당에 갈까 지옥으로 갈까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의 행실로 인하여서 정죄당하고 판단을 받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판단 받아야 하는 판단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 용어로 말하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 행함과 상관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사는 것을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 이렇게 살다가 짤리는 것 아니냐 라고 하면 그게 바로 육신으로 사는 거에요.


내 꼬라지에 의미를 두는 것은 육이에요.


 


영은 내 꼬라지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래서 바울은 더 이상 우리 꼬라지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 라고 하던 것으로 살지 말고 내 꼬라지가 어떻든 간에 나는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라는 것으로 살으라는 말입니다.


이걸 영으로서 몸에 행실을 죽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사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은 영으로 인도 받아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기 위하여 죄사함을 입은 자들에게 아들에 영을 보내 주었어요.


 


그러니 아들에 영을 받은 사람들은 죄인으로 살지 않고 의인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행실이 의롭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행실과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단 말입니다.  


아들에 영이 우리 행실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아들에 영이 내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앞세우고 아버지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더 이상 죄인으로 살지 않고 의인으로 살게 한단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빚은 진 자들이므로 육신으이 법대로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법대로 살면 예수그리스도가 헛 죽은 것이 되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우리더러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고 의에 종으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법으로 살지 말고 영에 법으로 살라고 죽으신 것이에요.


 


그래서 영에 법으로서 육신의 법을 죽이고 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라는 말은 우리가 잘못 살면 죽인다는 말이 아니에요.  


“너희들 죄 지으면 죽인다!” 라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도리어 반대에요.




너희는 너희 행위로 심판 받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행위로 이미 심판을 받은 자라는 말이에요.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너희 대신에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 이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라는 말이에요.


 


너희는 이제 법으로 대함을 받는 종이 아니란 겁니다.


양자의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은 법으로 대하지 않아요.


사랑으로 대해요.


 


주인은 종은 종에 행실을 가지고 따지지만 아들은 아들에 행실을 가지고 따지지 않아요.


너희는 아들에 영을 받은 아들이라는 거에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영으로 인도 받는다고 해요.


 


이렇게 살면 세상에서 욕을 해요.


법에 속한 자들이 반발을 합니다.


세상은 법으로 다스려져요.


자기 행실로 인하여 상(賞)과 벌(罰)이 주어진단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실을 가지고 상과 벌을 주지 않아요.


자기 백성들을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러면 세상 사람들 눈에는 부당하게 보여요.


반칙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세상 질서가 무너져요.


세상은 잘난 놈은 상을 주고 나쁜 놈은 벌을 주어요.


그래야 세상이 다스려져요.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상선벌악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져요.


 


세상은 법이 무너지면 개판이 되어요.


자기 맘대로 산단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힘 있는 놈만 살 수가 있어지겠지요.


그래서 세상은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죄인과 의인을 율법 지킴으로 판단했어요.


사람의 행실로 판단했어요.


율법을 지킨 자는 의롭다 하고 안 지킨 자는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단 말입니다.


 


예수가 와서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의인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걸 가만히 두면 율법이 다 무너지게 되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쟁이들을 몰아내야지요.


이런 놈들을 가만히 두면 율법 신앙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잖아요.


그래서 예수쟁이로 살면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되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요.


행위 차원으로 몰고 간단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분문은 도리어 행위를 보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바울이 지금까지 로마서를 전개 해 온 내용이 뭔가요?


율법이 아니고 은혜라고 하지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죄 또한 사람의 어떤 행위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정죄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하지 않고 누구 권세 아래 있는냐? 를 가지고 판단을 합니다.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로 판단해요.  


너 누구 아래 있느냐?


네 주인이 누구냐?


네 안에 종에 영이 있느냐! 아들에 영이 있느냐! 로 판단을 한다고 합니다.


 


사람은 빈 그릇과 같아요.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이 됩니다.


죄를 담고 있으면 죄인이라고 하고!


의를 담고 있으면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인간의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났습니다.


 


그 안에 죄가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아무리 외모가 출중해도 하나님 앞에선 다 동일해요.


 


신앙이란? 이걸 인정하면서 시작이 되어요.


이게 인정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난 죄인입니다” 라는 말은 곧 내 잘남도 의미가 없고 내 못남도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인간적인 잘난 것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처 들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못났다고 기죽을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우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자기 조건으로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건으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린 예수님과 하신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 에요.


이게 믿어지면 내 자신으로 인하여 희비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이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은 내 행위로 판단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성도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내 행위로 판단을 받는다면 믿음이 필요치 않아요.


그냥 내가 행한 것으로 판단을 받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안에서 판단을 받으니까


나는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하신 일로 판단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어요.


아들이란 말이에요.


이는 법에 속한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아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 있어요.  


이렇게 사랑의 관계로 사는 것을 영으로 몸에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하며 영으로 인도 받는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산다고 해요.


 


우린 육 아래 있지 않고, 영 아래 있어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어요.


다른 말로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담의 법칙으로 대하지 않고 예수의 법칙으로 대하세요.


 


아담 안에서는 법에 적용을 받지만 예수 안에서는 은혜를 적용받아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을 두 부류로 대하세요.


법으로 대하는 자들과 은혜로 대하는 자들이 있어요.


 


지금부터 인간 창조의 근원적인 이야기를 하니 잘 참고 하세요.


 


만물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각 자의 용도가 정해져 있어요.


그 용도에 따라 사용이 되어집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이 창조 하신 만물 속에는 두 세계가 있어요.


천지(天地)가 있어요.


하늘과 땅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잘 보세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지요.


누구를 위해서 창조를 했다고 합니까?


예수를 위해서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 하신 거에요.


 


만물의 창조 목적이 분명하지요.


예수를 위해서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이 목적 안에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고, 이 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罪)라고 해요.


예수를 위하여 살면 의로운 것이 되고 자기를 위하여 살면 불의가 되는 겁니다.


내가 사는 목적이 예수이면 의로운 자이고 내가 사는 목적이 내 자신이면 불법을 행하는 자에요.


 


예수님이 창조한 것을 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지요.


하늘에 것과 땅에 것이 있지요.


하늘에 속한 것을 영(靈)이라고 하고, 땅에 속한 것을 육(肉)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영(靈)에 속한 자가 있고, 육(肉)에 속한 자들이 있어요.


 


성경은 하늘을 빛이고 생명이라고 하고, 땅은 어둠이고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 중에도 하늘에 속한 자가 있고, 땅에 속한 자가 있어요.


하늘에 속한 자를 영에 속한 산 자라고 하고, 땅에 속한 자를 육에 속한 죽은 자라고 합니다.


산 자를 다른 말로 선인(의인)이라고도 하고, 죽은 자를 악인(죄인)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온갖 것을 그 씌움에 합당하게 지으셨고 합당하게 사용하세요.


 


잠 16: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을 사용하세요.


악인을 만들었다는 것은 악인으로 사용하고자 함이에요.


악당으로 써 먹으려고 창조한 거에요.


마귀도 피조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악인은 악한 날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비 언약의 후손을 말하고 선인이란 언약 백성을 말합니다.


쉬운 말로 절간에 스님이나 무당이나 점쟁이 같은 사람들은 비 언약에 속한 자로서 악인입니다.


비 언약의 후손이란? 포괄적으로 말해서 예수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을 말해요.


 


이들은 마귀에게 속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도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어요.


이들을 통해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선 자기 백성과, 그 반대 편에 선 사람이 있어요.


즉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사람과 예수를 배척하고 안 믿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이 둘은 항상 충돌을 하게 되어 있어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언약의 후손들을 괴롭히는 악당 노릇을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언약의 후손들이 드러나게 되어요.


상대적으로 그들은 언약에 후손들을 괴롭힘으로서 스스로 나는 비 언약의 후손입니다 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예수 믿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있어야 해요.


다 예수 믿으면 안 되어요.


반드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예수를 배척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예수를 배척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져 가요.


악당이 착하면 안 되어요.


그러니 누가 예수 안 믿는다고 섭섭해 하지 마세요.


 


한 집안 식구 속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다 함께 믿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해 놓지 않았어요.


물론 다 믿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 부분 그렇지 않음을 보게 되어요.


 


성경 속에 나타난 믿음에 가정들을 보세요.


 


아담의 가정에도 가인과 아벨이 있었고!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고!


이삭의 가정에도 에서와 야곱이 있었고!


야곱의 가정에도 요셉과 다른 형제들이 있었어요.


바울은 유대인 안에서도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도 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안 믿는 식구들을 원수시 하면 안 되어요.


긍휼로 대하여야 해요.


내가 은혜를 받아서 그가 강퍅하다고 보세요.


그러면 내가 빚진 자가 되어요.


도리어 그들에게 더 살갑게 대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에이~ 지옥에 갈 인간!


그러면 안 되어요.


성도에게는 긍휼이 나와야지 법이 나오면 안 되어요.


 


바울이 이걸 알고 난 후에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던 동족들에게 자기는 빚을 졌다고 했어요.


나만 구원 받아서 미안하다고 했다니까요.


그러니 누가 나를 핍박한다고 해서 에이~ 저주 받을 악당들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다 내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알게 하시려고 그런 구조 속에 두신 거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핍박하는 사람이 있지요.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인간들의 살아가는 모든 것 속에는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것들이 들어가 있어요.


 


드라마 속에도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는 구조로 짜여져 있어요.


그것이 선과 악이 대립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 속에는 항상 선악의 대립구조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되지요.


이게 모두 다 이 세상이라는 역사 자체가 예수님과 마귀의 투쟁을 모티브로 하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 자체가 천지(天地) 즉 하늘과 땅이라는 두 구조(構造)로 되어 있어요.


하늘과 땅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일을 해요.


상대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조 기사가 두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


저녁에서 아침!


이게 엿새 동안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일곱째 날이 되면 이 구조가 사라집니다.


 


일곱째 날이 되면 어둠이니, 저녁이니, 죽음이니 하는 부정적인 것들은 다 사라져요.


일곱째 날에는 어둠도 없고, 저녁도 없고, 죽음도 없어요.


그래서 일곱째 날을 일컬어 거룩하고 복된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을 여호와께서 모든 일을 완성하시고 쉰다고 하여서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아니고!


천국을 상징하고 있어요.


이걸 혼동하지 마세요.


 


첫 창조의 속한 것은 모두가 모형이지 실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친국을 상징하는 일곱째 날도 모형이지 실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실제는 창조 바깥 세상에 있어요.


 


이 날을 여덟째 날 즉 팔 일이라고 해요.


팔 일이란? 창조 바깥에 있는 날이란 말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설명 할게요.


 


그러니까 창조의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창조에 속한 날이에요.


이 세상의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므로 창조의 날 속에도 역사에 속한 날과 묵시에 속한 날을 모형으로 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역사에 속한 날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일곱째 날은 역사 바깥에 있는 묵시의 날을 보여주는 모형인 것입니다.


즉 안식일이라고 하는 일곱째 날도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모형이에요.


모형!


이걸 잘 이해하세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다 사라진다고 하지요.


첫 창조에 속한 것은 다 사라진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지요.


 


창세기에서 말하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은 모두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에 속한 것이에요.


첫 창조에 속한 것이란 말입니다.


첫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은 모형이에요.


사라질 것들이에요.


 


모형이란? 실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만든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실상이 오면 모형은 철거가 되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서는 만물은 철거가 될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사라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첫 창조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땅에서 난 우리 몸도 죽어야 해요.


두 번째 창조에 속한 몸이 있어요.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로부터 오는 장막을 덧입는다고 했어요.


덧 입는다는 말은 예수 때문에 고난당한 자들에게 안식으로 갚아 준다는 말이에요.


우리는 하늘에 몸을 입어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안식하게 되어요.  


그러니까 창세기의 창조 역사 속에서 모든 일을 다 하시고 쉬셨던 일곱째 날은 천국이 아니고 천국을 모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천국은 모든 것이 다 완성된 세계에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안식을 하십니까?


아니에요.


못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까 자기도 일을 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아직까지 일곱째 날인 안식일은 역사 속에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역사 바깥에 있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 안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16-21=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이 날이 안식일이에요.


율법적으로 하면 안식일은 일하면 안 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야! 너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일을 하시고 있으니까 아들도 일을 한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니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으니 아버지가 하는 일인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안식일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첫 창조에 속한 안식일인 일곱째 날에 창조 바깥에 있는 여덟째 날에 안식일을 위하여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진정한 안식일이 없어요.


다만 모형일 뿐이에요.


율법 속에 있는 안식일은 다만 장차 안식하는 날을 예표 하는 날인 거에요.


실상이 아니고 그림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자들을 해방시켜서 살리는 일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하나님은 안식 할 수가 없어요.


안식은 역사 바깥에 나아가야 주어져요.


그러니 역사가 존재하는 한은 여전히 엿새에 속한 날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서 창세전에 언약 하셨던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역사는 철거하고 묵시 안에서 진정한 일곱째 날로서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날은 곧 여덟째 날인 제 팔 일이 되어요.


 


일곱째 날은 장차 여호와께서 안식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의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은 다른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일곱째 날을 가지고 장차 오는 안식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엿새에 속한 날과 다르게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저녁이 없어요.


그냥 낮만 있어요.


이는 천국을 모형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국에는 어둠도 없고!


사망도 없고!


저녁도 없어요.


 


천국은 항상 빛이고!


그 곳에는 영생하는 곳이고!


항상 낮이에요.


 


하나님은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를 가지고 역사와 묵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을 통해서 역사를 말해주고 있고,


일곱째 날을 통해서 묵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역사에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뭔가 일을 하시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미완료와 미완성의 모습인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역사 바깥에 있는 완성된 안식의 세계 즉 묵시의 세계를 말해주고자 일곱째 날에는 더 이상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고 완성된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이 없어요.


저녁이 없어요.


그냥 아침이에요.


그러니까 일곱째 날은 엿새에 속한 날과 대조 적인 날인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역사에 속한 날을 상징하고, 일곱째 날은 묵시에 속한 날을 상징해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미완료이고 미완성의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완료이고 완성이에요.


부족함이 없어요.


그래서 일곱째 날을 일컬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져 안식을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 이루어진 세계를 천국이라고 해요.


이 천국은 역사에 속하지 않고 묵시에 속하였어요.


그러니 진짜 천국은 일곱에 속하지 아니하는 세계에 있는데 이 날을 여덟째 날이라고 해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을 가지고 이 세상 역사를 말해주고 있고!


일곱째 날을 가지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묵시 세계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을 가지고 역사와 묵시를 보여주는 시청각교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도 역사에 속한 날이에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하잖아요.


태초 이전에 있는 세계를 묵시라고 했지요.


묵시를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피조물 바깥에 있는 나라에요.


 


피조물 바깥에 있는 나라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해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요.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어요.


 


이 나라는 피조물 바깥에 있는 나라에요.


창조 바깥에 있는 나라는 피조물이 감지(感知)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이 보이지 않는 창조 바깥에 있는 나라를 모티브(근거)로 해서 보이는 이 세상 나라를 창조하신 겁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신 말씀은 보이지 않는 나라에 계신 하나님이 이 보이지 않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고 보이는 나라를 만드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창조 하신 나라도 보이지 않는 나라를 상징하는 천(天, 하늘)과, 보이는 나라를 상징하는 지(地, 땅)로 만든 겁니다.


 


천지(天地)란? 두 나라에요.


하늘은 보이지 않는 나라이고, 땅은 보이는 나라를 예표하고 있어요.


하늘은 창조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나라를 예표하고, 땅은 창조 세계인 보이는 이 세상 나라를 예표하고 있어요.


      


보이는 이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를 근거로 만들어졌다고 했지요.


며칠 동안 만듭니까?


일곱째 날 동안 만들지요.


 


그러니 일곱째 날도 보이는 이 나라에 속한 것이에요.


첫 창조 속에 있는 날이란 말입니다.


첫 창조 속에 있다는 말은 보이는 이 나라에 속한 것이란 말입니다.


 


창조에 속하였지만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일곱째 날을 엿새와 다른 날로 구분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비록 엿새에 속한 날과 다르게 구분을 해 놓았지만 여전히 첫 창조 속에 있는 날이에요.


그러니 일곱째 날도 역사에 속한 날인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 창조에 속하지 아니하는 일곱 째 날에 속하지 아니하는 날을 말해주고자 여덟 째 날에 속한 안식일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팔 일 안식일이 있어요.  


우리는 제 칠 일 안식일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에요.


제 팔 일 안식일이 있어요.


  


성경에서 팔 일이란? 역사 바깥의 날을 상징하고 있어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지요.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고 있잖아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에요.


 


여기서 새로운 사람이란? 세상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행하라는 말은 너희는 비록 일곱째 날에 속한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실상은 너희들은 일곱째 날 바깥에 있는 여덟째 날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여덟째 날인 제 팔 일에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할례 속에는 역사라는 일곱째 날에 속한 자는 죽고 여덟째 날에 속한 자로 거듭난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팔 일 할례는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 팔 일이 안식일이에요.


 


초막절이 되면 팔 일 안식일이 있어요.


 


레위기 23:33-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3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동안 지킬 것이라 35 첫 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36 칠 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 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37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를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각각 그 날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지니 38 이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너희의 헌물 외에, 너희의 모든 서원 예물 외에, 너희의 모든 낙헌 예물 외에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니라 39 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제 팔 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초막절을 칠일 동안 지키는데 첫 날에도 안식하지만 팔 일에도 안식해요.


이 팔 일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날이에요.


역사는 일곱이라는 싸이클로 돌아가지 여덟이라는 것이 없어요.


 


역사 속에는 일곱째 날의 안식일은 있어도 여덟째 날에 안식일은 없어요.


그런데 초막절이 되면 여덟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어요.


초막절은 맨 마지막 절기에요.


그러니까 여덟째 날은 절기 바깥에 있는 날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보면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만 있지요.


일곱째 날이 안식일이잖아요.


거기엔 팔 일 안식일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초막절을 통해서 팔 일 안식일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어요.


초막절이 무슨 날인가 하면 모든 절기를 마치는 명절이에요.


 


이스라엘에겐 7대 절기가 있어요.


 


일 년이라는 싸이클은 온 역사를 상징하고 있어요.


온 역사를 일 년이라는 절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봄 절기와, 여름 절기와, 가을 절기가 있어요.


 


봄 절기에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고!


여름 절기로는 오순절과 넉 달 농사가 있고!


가을 절기로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이 절기는 이 세상 전부를 함축하고 있어요.


봄 절기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징해요.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유월절 어린 양의 되어서 십자가에 죽었어요.


이게 봄 절기에요.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오셨어요.


이때부터 성령으로 구원 농사를 짓는 겁니다.


이게 이방인을 구원하는 넉 달 농사하는 여름 절기에요.


 


그리고 나서 가을이 되면 추수하잖아요.


나팔절이 되면 제사장이 성전에서 나팔을 불어서 온 백성들을 모아요.


이것은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앞세우고 하늘로부터 강림하여서 온 세상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모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의 모형이에요.


이게 가을 절기에요.


 


이 가을 절기 속에 초막절이 있어요.


초막절은 절기 중에서도 맨 마지막 절기인데 이 절기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장막 안에 거한다고 하여서 “장막절”이라고도 해요.


또 다른 말로는 추수한 곡식을 곡간에 들인다고 해서 “수장절”이라고도 해요.


이건 예수님이 천국 백성들을 다 천국 곡간으로 데리고 간다는 의미에요.


 


그런데 이 맨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에 제 팔 일 안식일이 있어요.


팔 일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의 세계를 상징해요.


그러니 첫 창조에 속한 역사 속에서의 모든 절기를 끝내고 난 후의 일곱 째 날을 넘어서 있는 안식의 세계를 제 팔 일 안식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팔 일 안식일은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을 상징해요.


초막절의 제 팔 일 안식일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절기가 없고 겨울은 쉬는 날로 다음 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장차 가서 누리게 되는 천국에서의 안식일이 바로 제 팔 일 안식일이에요.


그러니 제 칠 일 안식일은 역사 속에서 장차 묵시 안에서 주어지는 안식일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제 팔 일 안식일은 역사 바깥에 있는 안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이 제 팔 일에 주어지는 구원을 예수님께서 암시적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누가복음 9장입니다.


 


눅 9:25-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를 볼 자들이 있다고 하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말하고 있어요.


얘들아! 너희들이 나를 따르다가 죽임 당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를 믿으면 죽음 너머 있는 세상으로 간단다!


너희 중에 그 나라를 볼 수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 팔 일 만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 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팔 일 후라는 말은 세상 바깥이라는 말이에요.


그래서 세상과 구별된 곳인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름하여 변화산이에요.


베드로는 이 산을 거룩한 영광의 산이라고 했어요.


 


이는 제자들에게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를 알려주고자 함입니다.


이 나라가 바로 여덟째 날에 속한 곳이에요.


예수님이 기도 하시자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중에 광채가 나면서 변화되는 겁니다.


그러자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하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이 광경을 보고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팔 일에 속한 곳이에요.


변화산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를 상징해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팔 일이 되어요.


 


노아 홍수 사건 속에도 이러한 모형이 들어있어요.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나지요.


노아가 방주 속에서 비둘기를 칠 일 만에 내 보냅니다.


그러자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옵니다.


 


그리고 다시 칠 일 후에 비둘기를 내 보냈는데 안 돌아와요.


비둘기가 여덟째 날로 간 겁니다.


홍수 속에서 살아난 비둘기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모형이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새 감람나무가 있는 여덟째 날에 속한 곳으로 가요.


 


노아 홍수는 장차 이 세상을 멸하는 것의 모형이에요.


그럼 홍수 속에서 살아난 자들은 성령으로 거듭난 자로서 비둘기처럼 역사라는 심판 속에 속한 칠 일을 넘어 서서 심판이 없는 새로운 세상인 새 감람나무가 있는 여덟째 날에 속한 곳으로 가는 자들이에요.


 


이 여덟째 날을 성회로 모이는데 이를 “거룩한 대회” 라고 해요.


 


레위기 23장 36절 “이레 동안에 너희는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대회(大會)란? 큰 날이란 말입니다.


온 세계만방에 흩어진 자들이 다 모이는 그런 날이란 말이에요.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온 민족이 다 모여요.


창세 이후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다 모여서 여호와의 안식일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창조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있어요.


예수가 주인공이에요.


마귀는 예수를 괴롭히는 악역을 맡았어요.


악역을 맡는 자는 집요하게 주인공을 괴롭히고 힘들게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주인공이 드러나게 됩니다.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에게 속한 자들이 있고 악당에게 속한 자들이 있듯이 이 세상에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있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있어요.


이 둘은 항상 싸워요.


 


세상 모든 인간은 예수 편과 마귀 편으로 나누어졌어요.


예수에게 속하든지 마귀에게 속하였어요.


중립은 없어요.


다 소속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으셨어요.


 


소속이 된 자들은 자신이 소속이 된 주인의 운명에 동참하여서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에게 소속이 된 성도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것을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어요.


반대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마귀 행세를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그 사람의 행동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두 구조를 교회 안에 그대로 배치해 놓으셨어요.


마치 아브라함이라는 한 집안에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이 함께 살고 있었듯이 교회 안에도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의 후손이 함께 있어요.


이걸 밭에 가라지와 곡식이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이나 이삭 모두가 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언약의 후손도 아버지라고 하고 비 언약의 후손도 아버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언약의 후손 안에는 은혜와 사랑이 내장 되어 있고, 비 언약의 후손 안에는 법이 내장 되어 있어요.


 


아버지는 아들을 두 법으로 대해요.


하나는 사랑으로 대하고, 하나는 법으로 대해요.


육으로 난 자는 법으로 대하고, 언약으로 난 자는 사랑으로 대해요.


자식도 아버지를 대하는 것이 달라요.


법으로 난 자식은 아버지에게 법으로 나아가고, 언약으로 난 자식은 아버지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요.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도 비 언약의 후손은 법으로 살고, 언약의 후손은 은혜로 살아요.


 


이건 노아의 아들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하여서 발가벗고 있지요.


이 때 함은 아버지의 수치를 들추어내는 일을 하고,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일을 합니다.


 


함 속에는 수치를 드러내고 참소하는 법이 작동하고 있었고,


셈과 야벳 안에는 수치를 가려주고 덮어주는 은혜가 작동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동일한 사건을 가지고서도 서로 상반된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함은 수치를 드러냄으로서 스스로를 “나는 법에 속한 사람입니다” 라고 드러낸 것이에요.


반대로 셈과 야벳은 수치를 감추어줌으로서 “나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를 드러낸 것입니다.


 


복음을 힘으로 삼는 자는 다 함과 같은 계열이에요.


그러니 함처럼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맨 날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논쟁하고 분쟁을 해요.


 


진짜 복음이 이런 자들 때문에 가려지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합니다.


복음 안다고 하니 문제인 겁니다.


 


교회 안에 보면 이게 극명하게 나타나요.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남에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남에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일을 해요.


동일한 복음으로 가지고서도 어떤 사람들은 남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는데,


어떤 사람은 남을 헐뜯고 물어뜯어요.


 


어떤 사람은 복음이 합당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복음에 반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의 행동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고 했어요.


 


자기 안에 선(善,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을 살리는 선을 내어 놓고,


자기 안에 악(惡, 사망)이 있는 자는 생명을 죽이는 악을 내어 놓는다고 했어요.


그리하여 결국 자기가 한 말에 자기가 심판을 당한다고 하셨어요.


남을 정죄하던 자들은 그 정죄로 자기도 정죄 당하고,


남을 용서한 자들은 그 용서로 자기도 용서를 받게 되어요.


 


그래서 각 자 자기가 한 일을 하나님 앞에 직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행위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맺은 열매를 통해서 자기 소속을 드러내 주고 그 소속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의 행함이 스스로의 소속을 드러내고 자신의 행함이 곧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육신으로 사는 자가 있고 영으로 사는 자가 있다고 하지요.


 


육신에 속한 자가 있고, 영에 속한 자가 있다고 하지요.


여기서 말하는 육신이란? 우리 몸뚱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의 법칙을 말해요.


 


“영에 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에 법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


“영에 법”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 법으로 살고!


“육에 법”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사는 것을 말해요.


 


믿음으로 살면 영으로 사는 것이고!


자기 행실을 근거로 살면 육으로 사는 것이에요.


영과 육을 잘 구분하시고 그 의미를 잘 이해하셔야 해요.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로마서 해석이 뒤죽박죽이 되어요.


어떨 땐 “믿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다가!


“어떨 땐 행하세요” 라고 하게 된 단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행위 차원으로 이해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서 “몸에 행실을 죽이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세요!”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로마서는 우리의 착함과 악함을 가지고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아요.


로마서는 모든 인간은 다 똑 같다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이래 있다고 합니다.


둘 다 죄에 그늘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죄가 덮고 있어요.


그러니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마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이고!


의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의에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인가요?


인간은 죄인이고 예수님만 의인이에요.


 


인간은 죄 아래 팔렸어요.


죄로 가득해요.


그래서 죄인이에요.


이러면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죄가 발생시킨 행위에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나라에만 있어요.


하나님 나라의 의는 받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는 오직 죄와 상관없는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으로부터 주어져요.


 


예수님은 죄와 상관이 없는 세상 바깥에서 오셨어요.


하늘에서 왔어요.


예수님만 의인이세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가 되듯이 예수님 안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의에요.


예수님의 것을 붙잡으면 의이고,


예수님의 것을 붙잡지 않으면 죄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언약을 하실 때 이미 하늘에서 의가 주어질 것을 염두에 두셨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을 삼는다고 약속하셨어요.


 


이 약속을 바탕으로 세상은 창조가 되었어요.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보세요.


 


창 1: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지요.


그런데 창조된 세상이 뒤죽박죽입니다.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하고 공허해요.


한마디로 죽었어요.


 


이건 만물의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구현하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자기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다고 했지요.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는 말은 곧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이렇게 예수로 인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고 했어요.


 


이 모습이 창세기 1장 2절의 창조 세계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창세기 1장 2절의 세상을 보세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 중에 있지요.


이건 죽은 세상이란 말입니다.


 


죽은 세상 위에 하나님의 신(神)이 운행하십니다.


뭔가 일을 하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운행 할까요?


이는 죽은 자를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은 세상에 생명을 주고자 함입니다.


 


명령만 떨어지면 일을 해요.


이 때 하나님 말씀이 떨어집니다.


말씀이 나와서 죽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하십니다.


 


죽은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하시는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면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말씀이신 하나님이 흑암이 깊음 중에 있고 혼돈과 공허한 세상 속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가 하면 빛과 어둠을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불러냅니다.


참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빛이 어둠을 삼켜요.


빛이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어둠이 빛을 품고 있어요.


사망이 생명을 삼키고 있는 형국이에요.


이름하여 죄에요.


죄가 뭐냐?


역리(逆理)에요.


사망이 생명을 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하나님이 역리를 순리로 바꾸는 일을 하십니다.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말씀이신 하나님인 예수님이 하세요.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세요.


죽은 자 속에서 산 자를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을 상징하고 있어요.


죄는 어둠이에요.


죄 아래 자기 백성들이 있어요.


마치 애굽에 언약의 후손들이 있는 것과 같아요.


 


애굽은 죽은 나라에요.


죽은 나라 속에 산 자들이 갇혀 있는 것입니다.


애굽은 어둠에 나라에요.


언약의 후손들은 빛에 아들들이에요.


 


그런데 그 빛에 아들들이 잠시 동안 어둠에 갇혀 있었어요.


왜? 그런가요?


예수님에 의해서 빼내심을 입기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가 질서정연한 생명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고 죽은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하셔야 할 일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시작을 이렇게 어둠에서 빛을 불러내는 것으로 운을 떼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러한 식으로 찾아내신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에요.


성경의 핵심 사상은 천지 창조가 아니에요.


 


성경의 중심 사상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에요.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는 일이에요.


하나님은 지금 천지 창조 사건을 가지고 창세전 언약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인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가 된 세상이 죽음(어둠) 아래 가두어진 세상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기 위한 시청각 교제에요.


성경 전체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천지 창조 이야기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창 15:1-14=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주는데 어떻게 주는가 하면 하늘에 별처럼 주신다고 하지요.


이건 하늘에 방법으로 주신다는 말입니다.


 


별 하면 퍼뜩 떠오르는게 있지요.


예수님이 탄생 하실 때 별이 나타나서 동방박사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잖아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별이 알려 주는 것은 이 예수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도 별과 같이 생겨나요.


하늘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이걸 약속의 후손이라고 해요.


 


그런데 아브라함 후손들이 이방에 객이 되어 있다가 건짐 받는다고 되어 있지요.


이스라엘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언약을 위해서 애굽에서 종 노릇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빼내 주신다고 하셨어요.


 


이 모두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언약 후손의 세상에서의 운명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죄 아래 있다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입게 되었어요.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은 겁니다.


 


성경은 다 이 이야기를 해 주고 있어요.


다 같은 이야기를 여러 가지로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게 보여요.


만물이 예수의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는 언약을 보면 제물의 죽음으로 하지요.


삼년 된 제물을 쪼개서 하잖아요.


여기서 언약의 제물은 예수님이 공생애 삼년 만에 십자가에 쪼개어질 것을 상징하고 있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언약은 제물의 죽음으로 지켜질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고 구원을 받는 것의 모형이에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언약을 체결 할 때 삼년 된 쪼개진 제물은 곧 유월절 어린 양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가 신약으로 오면 바로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이 쪼개어졌어요.


이렇게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는 것이 새 언약이에요.


 


누가복음 22장을 봅시다.


 


눅 22:14-20=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유월절 예식을 합니다.


그런데 이 번에 지켜지는 유월절은 달라요.


그 동안은 어린 양을 잡아서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린 양 대신 떡과 포도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떡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린 양은 곧 예수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곧 자기백성들의 죄사함을 주기 위한 것이에요.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이 유월절 언약 안으로 귀속이 되어서 완성이 되었고!


다시 유월절 언약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성취가 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당하였듯이 예수님의 새 언약으로 자기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은 예수님의 새 언약을 겨냥하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도 예표(豫表)가 됩니다.


진짜 이스라엘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 피로 살아나는 자들이에요.


이걸 이면적 유대인(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영적 이스라엘이란? 언약으로 난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이든 신약이든 자기 백성들은 언약으로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으로 난 육적 이스라엘은 하나의 예표에요.


장차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 날 자들의 모형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에 적용을 받았어요.


아브라함 언약에 보면 이방에 객이 되었다가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잖아요.


이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종 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면 빼내심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한 때가 되어서 모세를 보냅니다.


그리곤 언약의 후손들을 이방나라에서 빼내서 가나안으로 인도 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러한 구조 안에서 구원을 받아요.


우리도 예수님의 피로서 죄로부터 건짐을 받았어요.


우리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행위로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라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어요.


성령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걸 영으로 산다고 하고 영으로 인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원리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 받는 자들이고!


이러한 사람들이 아들에 영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내 꼬라지로 인하여 무서운가요?


그럼 종입니다.


내 꼬라지와 상관없이 평안하신가요?


그럼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어요.


이름하여 고난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합시다.


Coming soon~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법대로 하면 벌써 저주 받아 지옥에 가야할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을 받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므로 이 큰 구원을 등한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습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정죄함 없이 감사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하나님의 실상
♣(설교)고후 3장 7-11 직분과 영광
Copyright by Ablenew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