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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부엌이 난장판이 되더라도

세 번째 12살이 되어서야 부모님 품을 떠나는 연습을 시작하다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2-08-11 11:42:28
"집에 밥은 있는데 먹을 반찬이 마땅치가 않거든, 네가 먹고 싶은 반찬 사 먹어 보기도 하고, 엄마, 아빠 없이도 잘 지내봐."

여름 휴가철, 부모님께서 단 둘이 여행을 떠나셨다. 여동생도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집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나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은 잠시뿐, '기회는 이때다!' 하며 환호성을 질렸다.

이 기회에 부엌을 한번 독차지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장애로 인해 행동이 느리고 손놀림이 어설퍼 부엌살림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부엌에서 내가 가족에게 가장 많이 들어본 말은 '니 방에 가 있어, 다 되면 부를게'이다. 가족들이 있을 때 내가 부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식탁 닦기와 반찬 뚜껑 열고 닫기, 수저 놓기, 설거지 정도이다.

집에 손이 빠른 부모님이든 동생이든 누구 한 명이라도 있으면 시장을 봐와도 '내가 해 줄게'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나 혼자 있을 때 아니면 언제 부엌을 독차지해보겠냐 싶었다. 부모님께서 힌트를 주신 '시장에서 반찬 사 먹어 보기'는 꼭 해보리라 다짐했다.

시장 한 바퀴를 돌던 중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를 파는 가게 진열 매대에 놓여 있는 콩국물이 눈에 띄었다. 찌는듯한 한여름 무더위, 살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콩국물에 삶은 국수를 얹어 먹어보고 싶었다.

마음과는 달리 콩국물 파는 집을 지나쳤다. 국수를 탱글탱글 맛있게 삶는 방법을 잘 몰랐다. 무엇보다 국수를 삶을 때 물이 넘쳐 부엌이 난리가 날까 봐 두려웠다. 반찬가게 앞도 그냥 지나쳤다. 한 번에 파는 양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왁작지끌한 시장통에서 내 작은 목소리가 들릴까 싶어서 반찬가게 주인에게 물어볼 생각도 안 했다.

지적 장애를 가진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치마폭에서 자랐다. '이쪽으로 가야 덜 헤매, 저렇게 해야 안전해' 하며 인생 길잡이 역할을 해 주셨다. 내가 잘 못하면 옆에서 대신해 주시기도 하셨다. 나 혼자 부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부엌 주도권을 쥐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굶고 지낼 순 없어서 국수가게에서 다 만들어진 콩국수 한 그릇을 사서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콩국수를 집으로 들고 오는 사이 면이 팅팅 불었는지 별로 맛이 없었다.

한 그릇에 8,000원이나 하는 만들어진 콩국수 대신 콩국물과 국수를 따로 샀더라면 그보다는 돈이 적게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땅이 저절로 쳐졌다. 국수를 담은 냄비 그릇은 넘칠지도 모르지만 팅팅 불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이 넘쳐 인덕션 주변이 물바다가 되더라도 내 손으로 국수를 삶아 보는 시도를 해 볼걸 하며 후회했다.

몇 년 전부터 부모님께서는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신다. 1년에 한두 번은 "니 알아서 밥 잘 챙겨 먹고살아" 하시며 홀연히 여행을 떠나신다.

올해 환갑을 맞으신 부모님은 '장애를 가졌지만 서른 넘은 자식을 언제까지 캥거루처럼 품고 살 수 없다.' 쪽으로 마음을 굳히신 듯하다. 매년 부모님과 함께 보내던 피서철, 올해만큼은 따라나서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 예년 같았으면 '내가 엄마, 아빠 아니면 언제 여행을 다녀보겠냐'며 따지며 철없는 12살 아이 같은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올해 난생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말이다.

부모님께서 또다시 집을 비우게 된다면 용기를 내서 반찬가게 주인에게 질문도 해 보고 국수도 삶아보리라! 부모님이 아닌 사람들과도 여행을 자주 다녀보리라! 언젠가는 다가올 부모님이 내 곁에 안 계실 상황을 대비하는 연습을 조금씩 해볼 참이다.

늦어도 네 번째 12살을 맞기 이전에는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를 알아볼 생각이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때를 대비해서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어쩌면 집 구하는 일보다도 시급할 수도 있다.

내가 자립을 위해 지금부터 부엌살림을 하나 둘 건드려본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지원은 불가피하게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진작에 자기 살림을 꾸려 나가 살고 있는 남동생처럼 뭐든 잘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게 될 테니까.

만일 내가 자립하게 되어 활동 지원 서비스를 받게 된다면 가사, 주거관리 같은 지원을 1주일에 4시간 정도 받으면 충분하다고 본다. '반찬 만들기', '상한 음식 구분하기', '이불빨래', ' 계절 옷 정리', '대청소', '형광등 갈기', '이웃과 분쟁이 일어날 경우 의사소통'과 같은 일들을 지원받았으면 한다. 활동 지원 서비스 시간을 더 받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될 것 같으니 그 이상의 시간은 사양한다.

아쉽지만 현재는 내가 가진 장애정도는 활동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최중증 신체, 발달 장애인에게만 활동 지원 시간이 집중되어 있다. 자신이 필요한 시기에만 받을 수 없다고도 들었다. 앞으로 10년 간은 제도가 바뀌는지 지켜보다가 바뀌지 않는다면 주변에 수소문해 볼 참이다.

'저... 한 달에 10분만이라도 좋으니 제가 사는 집에 오셔서 상한 음식 골라내 주실 분 안 계실까요?'

경증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도 부모님 없이 혼자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지길 바란다. 나보다 하루만 더 늦게 죽었으면 좋겠다는 부모님의 읊조림을 듣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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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김유리(uri2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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